금은돌(시인)
1.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기형도, 「여행자」에서)
여기, 칼춤을 추는 여인이 있다. 한 발은 모래알 사이에서 허우적대면서, 다른 한 발로 탈출구를 찾고 있다. 마흔일곱 번의 고비를 넘기며, 마흔일곱 번의 피를 흘린다. 마른 바람 사이에서 숨을 고른다. 마흔일곱 개의 주저흔이, 마흔일곱 번의 망설임으로 미끄러진다. 그녀의 대지는 막막하고, 칼은 기다림의 시간 위에 놓인다. 일 년 내내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애타게, 그러나 담담한 척, 눈치 채지 못하게, 그러나 그럴듯하게, 그리하여 능숙하게, 마흔일곱 번의 붓을 휘둘렀다. 마흔일곱 번의 그림은 무너짐의 흔적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이 도착하는 순간, 그녀는 칼을 벼리며 몸을 만들고, 어떤 춤을 추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녀는 통화 중.
일주일에 한 번씩, 애 닳도록 공부하는 여자. 일주일에 한 번씩, 기꺼이 길을 잃는 여자. 수요일마다 무너지는 여자. 그 무너짐을 견디는 여자. 칼자루를 쥐는 순간, 하얀 피가 떨어진다. 칼의 방향을 결정하기 전부터, 저리다. 그 손끝으로 흩어진 사건의 파편을 긁어모은다. 배치하고 뒤튼다. 캔버스 위에서, 서성인다. 실패한 자의 표정으로, 다시 일어서는 자의 손짓으로.
마흔일곱 번 들이마셨던 숨으로
마흔여덟 번 털을 세운다.
다시, 그러하기에
2.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기형도, 「오래된 서적」에서)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는 사건의 복합체이다. 말을 탄 선비가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선듯선듯, 소슬바람, 반쯤 걸쳐 있는, 버들잎, 흩날리듯, 아스라이, 존재자의 존재가 담겨있다. 그곳에 소년의 가려진 몸이 있다. 몸의 일부가 말[馬]의 의해 감추어졌으나, 소년 역시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돌리다 못해 정지한다. 말고삐를 잡고, “워, 워.” 소년이 몸을 돌린 곳은 소리의 진원지이다. 말을 탄 선비가 고개를 돌린 곳 역시, 그곳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적으로, 감각적으로, 행위가 발생한다. 새가 먼저 있었던가? 행위가 앞서 있었던가? 중요하지 않다. 소리의 진원지에 새가 앉아 노래 부른다. 가느다란 바람에 연둣빛이 흔들린다. 공기가 상쾌해지고, 소리가 경쾌해진다. 선비의 삿갓에 빛이 스치고 먼지가 가라앉는다. 소리와 바람, 햇살과 향기, 귀여운 날갯짓과 연두, 잎의 떨림과 말의 정지. 한 잎 한 잎, 순간순간, 생명이 담긴다. 화폭에 소리가 그려진다.
한 획(劃)이어야 한다. 입체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인위적인 원근법을 이용한 덧칠을 하지 않는다. A에서 B로 다가가는 평면적인 선(線)이 아니다. 붓으로 3D 입체 영상을 풀려나가게 한다. 인과론적인 시간을 초월한, 낯선 대기가 작동한다. 시각과 청각, 후각과 미각이 동시에 살아 움직인다. 멀티미디어의 주파수가 다차원적으로 흘러나온다. 시인 기형도가 일찍이 노래하듯, 시는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그 한 줄, 그 한 획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
애드거 앨런 포는 소설 「말의 힘」(『우울과 몽상』)에서 ‘아가소스’와 ‘오이노스’의 대화를 통해 언어 작용에 대해 설명한다. 멸종된 지구를 앞에 두고 오이노스가 질문을 하고 아가소스가 답하는 형식이다. 아가소스는 ‘대기’의 작동을 통해 말(언어)의 힘을 말한다. “땅 위에 사는 인간이었을 때 우리는 손을 움직여서 손을 둘러싼 대기에 진동을 줄 수 있었다. 최초의 진동은 무한히 뻗어나가 결국 지구의 공기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결국 단 한 번의 손 움직임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중략) 공기에 가해진 그러한 모든 자극은 결국,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기체에,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 이어서 “모든 운동은 창조하는 것”이라는 전제에 동의하면서, 오이노스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네 마음속에 어떤 실제적인 말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느냐?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공기에 자극을 가하지 않느냐?”라고.
공기에 자극을 주는 일. 우주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 그것이 한 획이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처럼 버드나무 잎과 새의 노래, 말발굽과 선비의 시선, 마부의 발걸음과 바람의 만물조응(萬物照應)이 한 획이다. 그 긴장된 설렘이 담겨있어야 한 획이라 명명할 수 있다.
한 획으로 짜릿하게, 그 획 안으로 절실하게, 마음을 담는다. 투명한 소원을 품은 주술을 걸고, 한 호흡으로 휘어져 들어간다. 털이 빨려 들어간다. 한 획은 그러므로, 휘말려 들어감이다. 한 획은 그러므로, 거침없음이다. 한 획은 그러므로 매혹이다. 한 획은 그러므로, 블랙홀이다.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공기 속의 유리병이다. 대기 속의 “푸른 유리병”(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이자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空中”(「포도밭 묘지 1」)이다.
한 획은 문(門)이 된다. 차원을 이동하는 타임머신이 된다. 한 사람의 아티스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떠한 고통을 통과하였는지, 그 고통을 넘어서는 삶의 과정을 보여주는 농축액이 된다. 붓을 통해, 캔버스를 통해 한 획으로서, 펼쳐놓아야 할 과제를 그녀는 안다. 내가 나를 넘어서는 과정이 한 획의 힘이라는 것을 예감한다. 알지만 모른다. 한 획의 꿈틀거림 속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되어 유희할 수 있도록.
3.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기형도, 「물 속의 사막」에서)
선어록에 그림을 덧붙이는 작업은 가변 세계로 뛰어드는 일이다. 불변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모델을 따르지 않는다. 상수를 거부하고 변수에 따라 흔들리는 일, 변수(變數)와 변인(變因)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언어적인 활동의 입자적이고 양자적인 수단으로까지 나아가는”(이진경, 『노마디즘』) 것을 포함하는 작업이다. 음향적 연속체 속에서 그녀의 칼춤이 살인검이 될지 활인검이 될지 알 수 없다. 무너뜨릴 형체가 분명하지 않다. 화용론의 무수한 변수 속에서 방황을 감수해야 한다. A가 A가 되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J가 되었다가, 상황에 따라 AA이었다가 –A였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선형적이지 않고 초선형적으로 무궁무진하게 변화하기에, 선어록을 읽는 일은 그 자체로 난감하다. 그 자체로, 고정 관념을 깬다. 그 자체로 자신이 딛고 있던 땅을 무너뜨리는 고행을 병행한다. 형체가 보이지 않기에 이러쿵저러쿵, 하다 망쳐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든다. 붓을
털을 다듬으며, 그녀가 인정한다. “언어 외적인 변수들이 체계적 단절보다는 오히려 주파수의 점진적 변용에 의해, 상이한 용법의 공존과 연속성에 의해 하나의 화행적인 복합체를 구성”(이진경, 『노마디즘』)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지의 음역을 개척하는 현대음악처럼, 경계와 경계를 지우는 작업을 시도한다. 유화와 먹의 경계를, 활자와 그림의 경계를, 음악과 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사이’를 벌려 중간 지대를 확장한다. 칼집에서 꺼낸 칼을 집어넣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칼은 이미 취모검(吹毛劒)이다. 입김만 불어도 가벼운 털이 두 동강 난다. 아슬아슬하고 날카로운 춤이 탄생한다. 누구의 입김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털의 운동이 시작된다.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답변이 변화한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기의 맛이 변한다. 털의 운동에 예민한 그녀가 매일매일, 캔버스 위로 자신을 내던진다. 몸을 비운다.
백지가 되기 위함이다. 역설과 반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토를 버린다. 흩어 놓는다.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황야로 내몬다. 미지의 장소이다. 그곳에서 바보/백치가 된다. 이것은 욕이 아니다. 바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최대한 끝까지 밀고 가는 자다. 백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서 벗어난 것을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자다.” (이진경,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그녀는 우직하게 끝까지 노력하는 바보이고, 규정성을 넘어서는 무위를 향해, 뚜벅뚜벅, 고통을 받아들이는 백치이다. 우아하게, 텅 빈, 무규정적 존재이다.
일 년 47주 동안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몰랐고,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릴 수 있었다. 몸을 비우고 기법을 버리고, 연기적 순간에 따라 오는 감각을 받아들였기에, 그리지 못할 뻔했던 것을 역설적으로 그려 내었다.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무엇을, 어떻게, 해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또 부딪혔다.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십니까?”라고 달마에게 묻듯, 그녀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모르겠습니다.”라고. 모르기에, 버텨왔다. 서양화에서 서예의 세계로, 서예의 세계에서 동양화의 세계로. 득의망상(得意忘象, 뜻을 얻었으면 상을 버려라)의 세계로.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면서, 한 획을 꿈꾸며, 끊임없이, 연마했다.
4.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기형도, 「포도밭 묘지 1」에서)
그리하여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림이다. 그런데 이것은 털의 운동이다. 하물며 붓의 고요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행의 흔적이다. 그러나 수행만이 아니다. 저것은 기다림의 결과이다. 더불어 과정이다. 혼(魂)이 길 위에 있다.
흔들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전제’를 뒤흔드는 화용론 위에 있기에, 지각 변동과 지진을 각오해야 한다. 균열하는 지축 위에서, 그때 그 순간, 대기의 뜨거움과 함께 흔들린, 작품임을 알아야 한다. 무너지면서 일어서는 그림임을 직감해야 한다. 그러한 운동성이 담긴 작품임을 바탕에 두어야 한다. 2017년 연희동의 대기에서, 수유너머 104의 대기에서, 화가 작업실의 공기에서, 인사동의 촬영장에서, 신문지면 위에서, on-line 상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내가 나를 넘어서기를 바라는 공기 방울들이 흘러넘친다.
한때, 하나의 흐름 속에서 유동하며, 맞장구치고 공감했던, 그 숱한 땀방울이 담긴 협동의 기록물이다. 2017년 1월, 촛불 광장에서 시작하여, 3월 10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대통령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고, 5월 9일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던 때의 공기가 섞여 있다. 11월 16일 포항에 지진이 발생하여 2018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짜가 연기되었던 대기가 담겨 있다. 12월14일 징역 25년이 구형된 최순실이 법정에서 비명을 지르던 소란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가?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렸습니다.”라고 아득하게 넘겨 버렸을까? 그러나 이 순간에도 고윤숙은 초월하며, 무너지고 있었다. 몰락하며,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초험적으로 넘어서, ‘나’라고 명명되는 규정들을 지우며, 모르는 곳을 향해 온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기꺼이 자신을 깨드리는 곳으로, 밑바닥이 붕괴되는 지점을 향해, 심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반복하여 일어서고 있었다. 동굴의 시간을 통과하며, 그녀 스스로 “넘어서는 자”(『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붓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부처를 죽여본 적이 있는가?
5. 내버려두세요. 뭐든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까? (기형도, 「소리 1」에서)
어느 스님이 파릉(巴陵)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취모검입니까?”
“산호의 가지마다 달이 걸려 있구나.”
아름다운 비약이다. 날카로운 칼날에 털이 잘려나가듯, 나뭇가지에 달이 조각난다. 숱한 조각, 조각, 조각들, 빛의 파편들이 흩어진다. 달빛을 자른 가느다란 것들이 취모검이었다. 사방 세계의 질료가 검이자 도구였다. 살아있는 획을 만들 수 있는 도구는 모든 곳에 있다. “한 티끌이 일어나니 온 대지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 송이 피어나니 그 속에 세계가 열린다.”(‘벽암록’ 19칙 垂示)
그녀는 마흔여덟 번째 일어서기 위해, 새로운 대기를 빚는다. 스스로 무너뜨릴 줄 알기에, 무섭게 태어날 줄 안다. 본인은 본인이 무서운 줄 모른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기에, 두려울 게 없다. 그 힘으로, 시작할 수 있기에 아름답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냥‘ 내버려 두는 일이다. “그냥”이 그냥, 어렵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개입하지 않고, 담담하게 지켜보는 일.
그녀는 이미 스스로의 주인이다.(隨處作主) 자신이 선 자리에서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안다.(立處皆眞)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오고가는 것을 담담하게 비출 줄 안다.(物來卽照)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넘어선다. 당연히
또 다른 검을 들 것이다. 그녀의 춤 덕분에, 나의 털이 쭈뼛, 선다. 그다음엔 어떤 춤을 출까? 활인검이 되어 날아오를까? 특이한 털의 감각으로, 우리를 어디에 데려다 줄 것인가? 그녀가 검을 휘두르지 않고도 혀를 떨어뜨리고, 눈 뜬 자의 멍한 눈을 멀게 했으면 좋겠다. 살아서 헛것이 아니도록 깊어지는 칼, 풍요로운 칼을 든 그녀를 상상한다. 지혜의 칼을 든 그녀가 시간의 오색 판을 돌려,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비약하길 기대해 본다. 그녀의 칼이 만물을 삼킨 뒤 광채를 토하도록, 사물을 사뿐하게 베어버리도록, 별 다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