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자리_말도 끊기고,생각도 끊긴

Place of Mind_Punctuated speech and thinking

고윤숙 6회 개인전

KOH YOON-SUK

6th Solo Exihibition

2016. 10. 6 (화) — 10. 15 (토)
11:00 a.m. – 06:00 p.m.

오프닝 행사 (OPENING)
2016. 10. 7 (금) / 05:00 p.m.

갤러리한옥
Gallery Hanok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0-10번지

 

작가노트

[마음자리_말도 끊기고, 생각도 끊긴]

말과 생각은 잠시 세상을 보는 수단 하나를 얻는 것일 뿐, 그것을 고집하는 순간 괴로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본디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나의 무지와 편견, 집착으로 인해 괴로운 것입니다.

들꽃 한 포기, 그 위를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나비들, 나의 키를 넘어 선 나무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있는 세계. 나에게는 그 모든 존재들의 힘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가운데 내가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 집 베다란 밑에서 매서운 겨울 바람을 이겨내고, 아가 고양이들을 홀로 낳고 잘 키우는 고등어무늬 고양이와 나는 하나입니다. 고양이와 나 그 자체로 독립적인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피부, 고양이의 털은 나이자 세상이고 세상이자 고양이이고, 고양이이자 나인 공존의 통로들입니다. 평등의 증거입니다.

나와 베개를 나누어 잠드는 고양이와 함께 우주를 호흡하는 나비와 키 작은 제비꽃과 분홍빛 개여뀌의 몸을 이루는 생명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나와 너, 모든 존재 생명의 몸은 우주의 크기와 같습니다.

막힘 없이 무한하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은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추상적으로, 부분적으로 포착하는 생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깊고 묘한 것입니다. 변화란 늘 부동 그 자체의 변화이기 때문에 더더욱 말로나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있음과 없음, 내가 살고 죽음은 나 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하늘과, 꽃과 새들과, 달과 무수한 별들과의 의존관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성은 모든 만물의 쉼터입니다.

나의 모습은 모든 인연이 만나 이룬 잠시의 모습일 뿐 그 자체로 우주의 전체 모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각각의 존재는 우주의 부분이 아닌 우주 그 자체입니다. 각각의 모든 존재가 있음으로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존재할 수 있고, 각각의 모든 존재들이 없음으로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 생명의 태어남에서 새로운 우주의 태어남을 볼 수 있고 한 생명의 죽음에서도 한 우주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태어남은 죽음과 같이 하고 죽음은 태어남과 같이 하는 생멸동시의 변화들이 무한히 겹쳐진 우주입니다.

때문에 바람 한 점 이는 것도 우주의 모든 움직임이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움직임도 그대로 온 우주를 관통하는 우리 모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존재들이 무한한 우주의 모든 생명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자기의 시간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결정은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 존재의 시간이 결정되려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시간이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곧 서로 다른 시간의 요소가 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시간이 되게 합니다.

이런 관계에서 본다면 한 사람의 시간 속에는 우주의 모든 다른 시간이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량없는 존재들의 한량없는 시간이 한 사람의 시간을 위해 존재하고 이 한사람의 시간도 한량없는 사람들의 시간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아울러 과거와 미래의 끝없는 시간은 한 순간, 곧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을 위한 원인으로 존재합니다. 한없는 시간이 한 순간의 변화일 뿐입니다. 공성의 창조적 변화인 한 순간의 시간이 모든 순간의 시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없는 시간과 한 순간의 시간이 공성으로 아무런 다툼이 없는 데서 현재의 한 순간이 됩니다.

시공의 제한을 넘어선 사람은 현재의 한 순간을 철저히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삼세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살고 있고, 아울러 한 공간을 차지하고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온 우주를 넘나들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 그대로 모든 것이며 모든 것 그대로 하나인 것입니다.

나를 나로서 살게 하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자비는 실은 나 스스로에게 베푸는 자비로, 이는 나를 이루고 있고, 내가 이루고 있는 온전한 생명의 장을 이루는 바탕입니다.

꿈같고, 물거품과 같은 순간들의 보이지 않는 생명들의 흐름을 맑게 드러내고자, 잠시 방편을 그립니다.

 – 스승들의 ‘지혜의 말’을 빌어서 쓰다.

2016년 9월 23일 금요일 새벽에, 고윤숙.

陀羅尼(다라니), 33.4×45.5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叵息妄想(파식망상), 40.9×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無盡寶(무진보), 40.9×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평 론

획(劃)과 탈주선, 혹은 생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최 진 석(수유너머N 회원, 이화여대 연구교수)

 1. 20세기 초, 러시아의 미래주의 시인들은 모든 문자가 사물 자체로부터 연원한 것이라 믿었다. 물론, 문자의 상형적 기원에 대한 언어학적 이론들은, 문자의 출현이 사물의 형태에 대한 모방에서 비롯되었다고 일찌감치 규정지은 바 있다. 중국의 갑골문자나 이집트의 그림문자처럼, 문자의 기원은 사물의 외형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행위라는 주장이 그렇다. 그런데 미래주의 시인들에게 문자와 사물의 관계는 단지 유사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문자의 사물적 유래에서 사유하고자 했던 것은, 사물이 갖는 견고한 무게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물리적 작용이었다. 무엇인가를 끌어당기고 변형을 가하는 힘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문자는 사물의 외적인 모양새를 본따 추상화한 기호가 아니라, 사물 자체의 기호로서 사물과 동등한 물성(物性)을 보유한다. 전자가 사물의 핵심만을 간추려 재현한 소극적인(negative) 추상화라면, 후자는 사물의 사물성 자체를 고스란히 담은 채 표현하려 했던 적극적인(positive) 추상화라 할 만하다.

이러한 사유의 진면목은, 물성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시화(詩化)되는지, 곧 예술적인 표현으로 응결되는지 살펴볼 때 선명히 드러난다. 미래주의자들에게 시는 드높은 사상의 고지(高地)도 아니요, 아름다운 감정을 자아내는 환상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시는 힘이다. 시인의 욕망이 독자의 감동에 있다면, 시는 모종의 타격이 되어야 한다. 시는 독자를 충격에 빠뜨려 휘청거리고 넘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는 다만 종잇장 위의 잉크자국에 불과하리라. ‘감동’이 아닌 ‘타격’. 그것은 시의 본질이 사상이 아니라 시적 언어, 문자에 깃들인 물성에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어느 미래주의 시인은, 만일 그가 백지 위에 ‘돌’이라고 쓰고서 그 종이를 뭉쳐 유리창에 던진다면 유리가 깨질 것이라 믿었다. 왜냐면 ‘돌’이라는 문자는, 현대 언어학이 가르치듯 돌이라는 사물과 자의적으로 맺어진 기호가 아니라, 돌이 지닌 물성을 체현한 기호이기 때문이다. 시는 사물이 지닌 물성을 강도적으로 응축해서 드러내는 방법이다. 시의 본질은 시 자체라기보다 시짓기, 즉 작시(作詩)에 있는 것이다.

물성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는 신비주의적 퇴행이 아니다. 그렇게 유추할 경우, 자칫 문자보다 사물을 우선시하고 기호를 신호로 맞바꿔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사물을 원본으로 삼고, 문자를 복사본으로 상정하는 이런 태도 속에서 자크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이 의지해 왔던 오래되고 강력한 전제를 읽어낸 바 있다. 사물을 직접 소환하는 목소리와 문자 사이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그러한데,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라 명명되는 이 위계는 글로 쓰여진 소리(‘사물’이라는 문자)는 죽은 것이며, 오직 살아있는 목소리(문자 바깥의 사물)만이 진실하고 진정하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사물들이 제각기 그 사물 자체일 수 있는 것은, 쉽게 말해 거북이는 거북이고 강아지는 강아지로서 서로 구별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들을 구별해주는 문자로서의 차이, ‘거북이’와 ‘강아지’라는 서로다른 문자들 덕택이다. 사물 자체보다 사물들을 구분지어 주는 문자가 더 선험적이라는 것. 사물들 사이의 차이를 표현하는 문자가 없다면 우리는 사물 자체를 사유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데리다의 문자, 즉 그람(gram)은 물론 통상의 언어와는 다른 차원에 있다. 자세한 논증은 접어두고, 다만 여기서는 그람이 사물보다 선행하되 사물성과 밀접히 결부된 힘의 차원, 즉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을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해 두자. 무엇보다도 차이는 분기(分岐)하는 힘이자 생성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 나는 그 사례를 그라마톨로지(그람에 관한 학문)의 영역본 표지에서 곧잘 떠올려보곤 한다. 19세기 일본의 화가 니카 다나카(田中日華)의 탱화에서 빌어온 이 표지의 중앙에는 수묵으로 그려진 어떤 기이한 대상이 있다. 머리 부분은 나무처럼 줄기와 잎사귀가 달려 있고, 다리 부분은 날개달린 동물의 하체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이 대상의 몸통 부분인데, 이 식물인지 동물인지 모를 형상의 몸뚱이는 각종 서체들이 주사(朱砂)로 찍혀 있는 여러 개의 낙관들로 이루어진 까닭이다. 이것은 대체 글씨일까 그림일까? 문자인가 사물인가? 생명인가 비생명인가? 혹은 우리가 보지 못한 기이한 형성이나 혼합, 생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無緣善巧(무연선교), 45.5×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捉如意(착여의), 45.5×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圓融(원융), 15.8×22.7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法性(법성), 15.8×22.7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2. 이번 전시의 비평문을 맡기로 하고서, 2015년 10월에 열린 고윤숙 작가의 개인전 도록을 바로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번 전시작들의 이미지를 서둘러 훑어보게 되었는데, 짧은 간격을 두고 벌어진 작풍의 변화와 차이에 얼른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혹이자 매혹. 흔히 이야기하는 ‘같으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같은’ 미묘한 연속과 불연속의 심상을 어떻게 포착해서 풀어낼 것인지 한참 주저하다가, 마감일을 앞두고서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이렇게 옮겨놓게 되었음을 고백해야 하겠다.

지난 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문자의 형상들이었다. 황색과 녹색, 또는 여러 중합된 색상들 전면에 나타난 크고 검붉은 초서체의 문자들.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 문자적 형상들은 글자의 형태와 이미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강렬한 힘의 역동(力動)을 발휘하는 듯하다. 문자의 도(道)로서 ‘서예’가 갖는 최대치의 능력을 목도하는 기분이랄까. 반면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은 전작(前作)의 풍모와는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상이한 역동성을 방사하고 있어서 놀랍다. 배경의 색채는 이전의 단색조를 넘어서 다성적인 울림 속에 혼합되어 있고, 이러한 배경 위에 문자의 형상은 글씨인지 아닌지 구별되지 않는 모양새로 해체된 채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 작품들에도 식별가능한 문자적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것들이 없진 않다. 그러나 그 대부분에는 한자 특유의 필치나 형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누구에게나 익숙하게 인지할 만한 한자 고유의 서체 형식은 박탈당하고 제거되었으며,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라지는 문자들? 아니, 문자는 남아있으면서도 지워지고 있다고 말해야 더욱 정확할 텐데, 왜냐하면 붓이 간직한 기세와 흐름 가운데 문자의 이미지적 힘이 여전히 감지되는 탓이다. 그러나 이는 통상의 문자적 의장(意匠)과는 전혀 다르다. 알다시피 서양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붓은 색을 입히고 붓의 텃치감을 물감의 형태로 남겨두는 ‘도구’에 가깝다. 이와 대조적으로 동양의 붓은 색을 칠하고 텃치감을 살리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동양의 붓, 글을 쓰는 붓은 문자의 형태를 조형하고 기세를 통해 전체의 형상을 탁마하는 ‘손’이라 할 수 있다. 붓을 쥐고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는 비유가 아닌 실재의 감각으로서 획(劃)의 본질을 이룬다. 따라서 붓을 잡는 것은 도구를 사용하는 행위가 아니라 붓과 신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감각의 운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문자의 형태, 그 형상을 구축하고 질서화하는 힘이 붓 끝에 담겨있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의 붓이 지나간 자리는 문자의 소진이 아니라 문자 아닌 것의 생성이라 말해야 옳지 않을까. 혹은 그것은 문자 바깥의 질서, 문자 아닌 문자의 형성을 가동시키는 그람의 운동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에서 사물의 모양새를 한껏 포착하고 조형해 낸다. 전작의 붓놀림이 무엇보다도 글씨의 형태를 유지하는 정력(定力)에 봉사하고 있다면, 이번 작품들에서는 그 정력이 세계의 사물들로 전이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물고기와 새, 거북이, 나무와 풀꽃, 벌레의 형상들이 자유분방하게 유동하며 자신을 드러내다가 어느 순간 문자의 형태로 환원되고, 또다시 세계의 형태들로 이행하는 열락을 누구든 만끽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조금 더 섬세하게 관찰하길 바란다. 형태가 아닌 형세(形勢)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물고기와 새, 거북이, 나무와 풀꽃, 벌레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그 형상들이 문자로 탈바꿈하고 다시 사물의 세계로 돌아가는 생성의 풍경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니카 다나카의 탱화를 다시 언급한다면, 그것은 글씨이자 그림이고 문자이자 사물이며, 생명이자 비생명인 어떤 기이한 운동에 다르지 않다. 공-동적(共-動的) 사건으로서 문자-사물의 변형과정이 여기에 있다.

놀랍게도 작가는 이 일련의 과정에 ‘수기(隨器)’, ‘비여경(非餘境)’, ‘무분별(無分別)’, ‘불사의(不思議)’라는 탁월한 제목을 붙여놓았다. 형태(그릇)를 따르되 비형태를 버리지 않기에 형태의 안과 바깥의 구별이 없고, 논리의 언어로 재단되지 않는다. 식별불가능한 생성의 장, 그것이 글씨와 그림, 문자와 사물, 생명과 비생명의 분할을 가로지르며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이로 인해 작가에게 문자-사물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분법적 형태화에 고착되지 않는다. 약간의 언어유희를 더 보태본다면, 모양새가 아니라 모양-세(勢)로서 우리는 오직 유동하는 힘만을 관찰할 뿐이다. 마치 세찬 물살이 길을 내며 흐를 때 그 형태를 드러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작가의 붓길은 그것이 지나가는 형적(形跡)을 문자의 권리 속에 가두어 두려하지 않는 듯하다. 획(劃)과 강도만이 모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탈형태, 문자의 해체는 또한 역으로 문자를 만드는 형태화의 힘, 중봉(中鋒)이라 불리는 붓의 운용 없이는 도무지 나타날 수 없는 현상임을 기억하자. 글씨든 그림이든, 문자든 사물이든, 생명이든 비생명이든 관건은 (탈)형식의 이행하는 힘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라면 이러한 표현의 기예를 욕망하는 기계(les machines désirantes)의 운동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신기한 체험, 즉 우리를 이상하지만 잠깐의 재미에 빠뜨리고 곧장 출입구로 인도하는 일시적인 유흥에 불과할까? 누군가에게는 그럴지도 모른다. 여가를 즐기는 문화생활로 작품들을 보고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문득 이 변형과 생성의 이미지들이, 식물인지 동물인지 괴물인지 또는 그 무엇도 아닌지 모를 이 형상 아닌 형상들이 망막에 떠올라 어느 순간 뇌리를 자극할 때,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계를 종전의 방식으로 만나지 못할지 모른다. 문자는 더 이상 문자로서 읽히지 않고, 사물은 사물 아닌 것으로 꿈틀대는 시간이 도래할 수 있다. 그 단초가 지금 이 작품들을 마주할 때 심어졌음을 나중에라도 기억해 볼 일이다.

 

 

無名(무명), 53×72.7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舊來不動(구래부동), 33.4×45.5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無相(무상), 53×72.7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一中一切(일중일체), 33.4×45.5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一卽一切(일즉일체), 33.4×45.5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3. 그람은 특정한 문자의 형태에 고착되지 않는, 차이화하는 근원적인 힘의 작용을 말한다. 만일 무(無)가 존재보다 앞서 있다면, 어떠한 생성도 근본적으로 허위나 결핍에 머물고 말 것이다. 존재가 우선하며, 그 존재는 정태적인 모양새가 아니라 동태적인 모양-세로서 생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거기엔 무엇인가가 항상-이미 움직이고 있다. 화선지의 하얀 바탕은 텅 비어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가 아니라 제약없이 무한하게 유동하는 힘으로 충전된 장(場)이다. 데리다가 고심 끝에 안출한 개념인 ‘흔적’은 이렇듯 언제나 원(源)-흔적으로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관없는 신체와 멀리 있지 않다. 무엇이라 부르든 결국 우리는 생성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윤숙 작가의 사유는 한편으로 불학(佛學)의 깊은 심연에 닻을 내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적 사상의 극한까지 아주 멀리 뻗어있는 듯하다.

예술가의 현재에 감탄을 금치 표하고 나면, 금세 우리는 그의 다음 여정에 관심과 기대를 걸게 마련이다.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신념이나 사상, 의지라기보다는 그의 신체에 장전되어 있는 힘을 그가 어떻게 불러내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생성의 힘을 모종의 형태 속에 끌어들이고 다시 그 형태를 넘어서게 만드는 변형과 이행의 과정 속에 담아내는 능력이 문제다. 문자의 강고한 굴레에 결박되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형태도 만질 수 없이 와해된 것만은 아닌, 기성의 감각과 인식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를 이루어내는 것. 탈주선은 이러한 능력과 표현에 붙여진 역설적인 이름에 값한다. 예술가의 붓이 전통과 규범이 정해둔 궤적을 넘어설 때, 탈주가 시작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지만 그러한 혼돈을 돌파하고야 비로소 우리는 전통과 규범의 세계가 이미 죽었음을 깨닫고 낯설지만 살아있는 세계의 형성을 알게 될 테니까.

러시아의 미래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시를 짓는 일이며, ‘돌’이라는 문자에 진짜 돌의 무게와 물리력을 심고 가동시키는 주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예술가란 이런 의미에서 주술사나 다름 없으리라.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들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하며, 그로써 익숙했던 감각의 질서를 무너뜨려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현세의 파괴자. 하지만 예술가가 그러한 불길한 참언을 입에 담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를 이 죽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고윤숙 작가의 다음 작업들에 관심과 기대를 감히 걸어본다. 하나의 작시(作詩)라 할 만하고 돌과 ‘돌’을 이어서 새와 나무, 거북이와 벌레, 물고기와 풀꽃을 생성시키는 획의 탈주선들을 벌써부터 만나고 싶다.

 

 

多中一(다중일), 33.4×45.5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 50×65.1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無量遠劫卽一念(무량원겁즉일념), 50×65.1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一念卽時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 50×65.1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隨器(수기), 27.3×40.9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非餘境(비여경), 27.3×40.9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無分別(무분별), 27.3×40.9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不思議(부사의), 27.3×40.9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能仁(능인), 24.2×33.4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海印(해인), 24.2×33.4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本來寂(본래적), 27.3×40.9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常共和(상공화), 27.3×40.9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多卽一(다즉일), 27.3×40.9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九世十世(구세십세), 27.3×40.9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隨緣成(수연성), 21.2×33.4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眞性甚深(진성심심), 21.2×33.4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證智所知(증지소지), 21.2×33.4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極微妙(극미묘), 21.2×33.4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滿虛空(만허공), 24.2×33.4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雨寶(우보), 24.2×33.4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無二相(무이상), 15.8×22.7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益生(익생), 24.2×33.4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便正覺(변정각), 27.3×40.9cm, Mixed Media on Canvas, 2016

Profile

고윤숙 / KOH YOON-SUK

선화예술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현 재. 동묵헌, 열림서예연구회 회원, 수유너머N 서예반 강사

2016
제6회 마음자리_말도끊기고 생각도끊긴 (한옥갤러리, 서울)

2015
제5회 변이의 여백 _ 존재의 기억의 말을 걸다 (갤러리 M, 서울)

2014
제4회 하나의 꽃 (한옥갤러리, 서울)

2014
제3회 花開華謝 _ 꽃은 피고 지고 (가나아트스페이스, 서울)

2006
제2회 北冥有漁 _ 북명유어 (토포하우스, 서울)

2004
제1회 거듭나기 (경인미술관, 서울)

2014
의난현예술학회대만한국미술교류전(宜蘭縣藝術學會臺韓美術交流展), 의난현, 대만.

제6회 샤샤전 갤러리이앙, 서울.

제43회 이서전(이화여대 서양화과 동문전) 인사아트스페이스, 서울.

제1회 열림 필가묵무(筆歌墨舞)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아트센터, 서울.

2013
제5회 샤샤전 선화예술고등학교 솔거관, 서울.

2011
세계평화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금문) 특선, 전각 입선, 안산단원전시관, 안산.

2010
제14회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한문서예(금문) 입선, 한국미술관, 서울.

제13회 신사임당, 이율곡 서예대전 전각 부문 입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제7회 서예문화대전 한문서예(금문) 특선,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2009
제7회 한국서화명인대전 출품, 전각 부문 입선, 세종문화회관 별관 광화문갤러리, 서울.

제1회 경향미술협회전 서예 한문부문(전서)출품, 경향갤러리, 서울.
제13회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전서)대련 동상. 한국미술관, 서울.
제6회 서예문화대전 서예 한문부문(전서) 입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제4회 경향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전서) 입선, 경향갤러리, 서울

2008
제12회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대련 특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제11회 신사임당, 이율곡 서예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한국미술의 빛” 초대전 서양화 부문 출품, 밀라노 브레라아트센터, 이탈리아.
“한국미술의 빛” 초대전 서양화 부문 출품, 갤러리타블로, 서울.
제3회 경향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경향갤러리, 서울.

2007
제10회 안견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서산시문화회관, 충청남도 서산시.

아트엑스포말레이시아, 서양화 부문 출품, 갤러리미즈, MECC, 말레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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