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의 여름
김시종 시에 부쳐
2017 스페이스선+ 추천작가전
고윤숙 개인전
KOH YOON-SUK
Solo Exihibition
2017. 3. 1 (수) — 3. 14 (화)
11:00 a.m. — 06:00 p.m. (무휴)
2017. 3. 1 (수) / 05:00 p.m.
스페이스선+ 갤러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삼청로 75-1
번데기
가령 번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비가 있어
나뭇가지 그대로 말라 버렸다 한들
날개는 서서히 절반의 몸인 채로 바람과 어우러지고
주변에 비상(飛翔)을 향한 꽃가루처럼 흩트리며
잎새 깊숙이 스러지겠지
(‘화신’ 1연)
화신(化身)
가령 번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비가 있어
나뭇가지 그대로 말라 버렸다 한들
날개는 서서히 절반의 몸인 채로 바람과 어우러지고
주변에 비상(飛翔)을 꽃가루처럼 흩트리며
잎새 깊숙이 스러지겠지
(‘화신’ 1연)
화석의 여름 – 김시종 시에 부쳐
글_고윤숙
어찌보면 이번 작품들은 시인 김시종의 시의 세계로 다가가려는 노력, 그 황홀하면서도 두렵기도 한 ‘심연’의 세계를 ‘마주하겠다’는 기쁜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계속 머뭇거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는 것일까. 다시 시를 읽고 또 시어를 테이프로 감은 검지 손가락으로 밑줄 그어가며 감촉하는 것일 게다. 점자를 읽듯, 지금의 시력과 시야로는 감지하지 못할 시인 김시종의 눈길을 따라가고자 다른 감각들을 불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화폭을 향하여 수직으로 엎드려, 기어가다시피 작업하는 나날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 여름에 그는 오노 도자부로의 추천으로 ‘오사카문학학교’ 강사 생활을 시작했고, 내가 4살 되던 해, 나의 생월인 8월에 그는 세 번째 시집인 <장편시집 니이가타>를 발간했다.
내가 화가로서의 자질과 꿈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고민하던 시기는 1980년 광주에서 대학살이 자행되던 때였다.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1983년 <광주시편> ‘바래지는 시간 속’)라고 하는 그와 같이, 나 또한 스무 살이 되기까지 거기에 없었다. 그 끔찍한 사태와 마주치고서야, 식민과 분단과 휴전의 상처를 여전히 앓고 있는 내가 살고 있는 여기에서 내가 없는 여기를 발견하게 된다.
1949년 제주 4.3 항쟁 이후 일본으로 밀항할 수 밖에 없었던 시인은, “내가 일본어로 시를 쓰는 일에 매달리는 것도 다시 일본어로 되돌아온 자신을 의심하는 내 안의 응시가 눈을 부릅뜨고 있기 때문”이며, “회천을 목격했던 ‘8.15’와 아직 당도하지 못한 ‘해방’이 양면의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어눌한 일본어에 어디까지나 투철하고, 유창한 일본어에 길들여지지 않는 자신일 것”,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일본어에 대한 그의 보복이라고 한다.
그는 결국, 자신이 어디에 살든, 자신이 살아내야 하는 시간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여,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로서나 혹은 현재로 불러내어 동일화하고 계열화해 버리는 기억으로서가 아닌, 여전히 응축되어 가라앉은 시간으로서 자신의 부재를 시어로서 창작해낸 것이 아닐까.
“시란 소통의 공간으로부터, 그 공간을 채우는 언어로부터 빠져 나온 말들이다. 그 말들에 실려 공유된 양식의 세계로부터 빠져 나온 사물들의 흔적이다. 그래서 시는 본질적으로 ‘어렵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다. 시는 소통의 언어가 아니라 그것을 교란시키는 언어고, 소통하기 위해 발화된 말들이 아니라, 그것을 정지시키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그 말들을 잠식하며 지워가는 공백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은 시가 아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인 것이 사유가 아닌 것처럼. 사유가 양식을 파괴하는 것처럼, 시는 공유된 의미를 밀쳐내고 공유된 감각을 마비시킨다.”(이진경 2017년 1월 <김시종 : 어긋남의 존재론 혹은 잃어버린 존재를 찾아서> 6강 중 1강 강의록 2~3쪽)
철학자 이진경은 김시종의 시를 만난 감동을 ‘밀물로 덮쳐오는 파도라기 보다는, 오는 건지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아련한 잔향’으로 묘사하며, ‘시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공유된 의미를 밀쳐내고 공유된 감각을 마비’시키는 시가 쓰여질 수 있는 것은 ‘시가 시인에게 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인이란 저 빠져 나온 말들이 덮쳐오는 이 두려운 순간을 아름다움으로 오인하는 자들이다. 그 오인 속에서 두려움을 잊게 되는 자들이다. 혹은 그 두려움을 안간힘으로 견디며 자기에게 온 그 말들을 받아 적는 자들이다”(위와 동일한 강의록 3쪽 중에서)
이러한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는 “필경 그 시인이 만나고 부딪치는 것들로부터 생겨나 오는 것이다. 그가 사랑한 사람들과 그와 다툰 사람들, 그가 겪은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생겨나는 줄 모르는 채 싹이 트고 발생하여 오는 것이다. 시인 자신이 살았고 또 살고 있는 삶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먼 곳을 떠돌다 뜻밖의 시간에 뜻하지 않은 곳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요컨대 시란 시인의 삶이 시인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다”(위와 동일한 강의록 5쪽 중에서)
시인 김시종 또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려는 나의 편력은 식민지 조선의 넓은 역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보이지 않는 헐떡거림의 흔적입니다. 누구에게 가 닿을지 모르지만 병에 담아 편지를 띄웁니다” (2016년 3월 8일, <조선과 일본에 살다, 재일시인 김시종 자전> 한국어판 간행에 부쳐 중에서)라고 말한다.
한 시인이 만난 세계 속에서 ‘헐떡거림의 흔적’으로서의 시를, 그와 같은 강도의 특이성으로 철학자 이진경의 목소리로 만났다면, 그 음성으로 전해진 시는 어떻게 ‘그림’이 되는가?
시인 김시종과 그 시를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흔적으로 읽어내는 철학자 이진경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그 세계를 마주하게 된 자의 목격은 어떻게 기록되는 것인가? 살아내고, 기록되고, 말해지고, 그려지는 것들은 어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누구에게 가 닿을지 모르’는 편지를 연이어 띄우는 것일까.
여전히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를 되물으며, 어떻게 ‘소통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감각을 창출하는 것으로서, 기존의 편견과 오랜 습속을 깨는 활달한 생명으로서의 회화적 언어를 만들 수 있는가를 묻는다.
뜨거운 숨결
얼어붙은 나무 둥치의 뜨거운 숨결을
거품 부글거리는 언어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축복’ 4연)
◼ 말을 하고 있다. 마음의 단에 스스로를 세우고 외치고 있다. 각막 안에 종이를 세우고 혀로 글을쓰고 있다. 그러나 목구멍 밖으로 숨소리만 세어 나올 뿐 그 누구도 듣지 못한다. 글도 보이지 않는다. 잠결에 웅성거리는 소리 없는 주절거림에 깨어 흘러 넘치듯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들을 주어 담으려 한다.
◼ ‘아차’ 싶다. 아찔하다. 붓질 한번에 낭떠러지로 끝없이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형체도 없는 욕심이 달라붙는다. 내 안에 수많은 눈들을 붙여 놓고 묻는다. 미친 사람처럼 그 눈들에 말할 권리를 부여한다.
◼ 자본의 축적은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의 피땀으로 살찌우다 못해 오히려 그들을 쓸모없는쓰레기처럼, 무수한 생명들을 바다에 매장하고 땅에 파묻고 소각해 ‘버린다’. 끊임없이 독식하고 또 먹어 치워도 자본의 배는 부르지 않는다. 질식해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도 그럴수록 더욱 폭력적으로 아이의 젖병까지도 낚아채 삼켜 버린다. 난민의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오지도 못한 채 죽어간다. 장벽을 세우고 모든 권리를 빼앗아 버린다. 마땅히 온전히 살 권리, 그 생명의 기본적인 권리들이 언제부터 저들의 전유물이 되었는가. 이제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사랑하고 새로운 생명을 양육하고 상상하고 꿈을 가질 수 없는 세상이다. 심지어 살아남으려면 그 피를 빠는 힘의 앞잡이가, 개가 되라고까지 한다.
◼ 나를 깨운 것은 그 ‘개’에 대한 궁금증이었던 것 같다. ‘그’ 또는 ‘그들’은 왜 그렇게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명을 붙여 배척하고 자유를 빼앗고 삶의 터전까지도 빼앗아 독식하는 포식자에게 스스로 온힘을 다해 평생을 바치는 것일까? 우리 안에서 그 개들을 키웠다. 포유류의 개와는 전혀 상관없는 ‘개’이다.
◼ 그들에게는 누군가의 아이, 누군가의 아들과 딸,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 친구 등의 자유와 권리나 생명은 아무 가치도 없다. 가차없이 내동댕이쳐 어떻게 죽든지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 아무 무게나 형상이나 두려움과 책임감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것들’일 뿐이다.
◼ 우리 안에서 그 ‘개들’을 키워내고 그 ‘개들’에게 먹히고 때로는 살기 위해 다른 생명들이 바쳐지는 것에 대하여 눈을 돌리고 마음을 닫기도 한다.
◼ 어떻게 30년이 넘도록 이토록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눈물이 흐른다. 이 새벽에 한없이부끄럽다. 가슴을 친다.
◼ 모네의 빛
밑 바탕의 진하고 어두운 색채 위에 흰색이 많이 섞인 밝은 색들을 거칠게 올림으로서 빛의 산란,반사의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모네의 거의 흰색이 지배적인 성당의 그림을 가만히 10초 이상 응시하고 있노라면 점차적으로 명암과 색의 대비가 선명해지고 강해진다. 재미있는 효과이다. 이것이 눈이 가지고 있는 기능의 어떠한 측면에 의한 것인지. 어떤 대상의 밝기에 대하여 적응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과학적으로 살펴볼 문제이다.
빛 속의 침묵
대낮 한복판에서조차
목소리를 그 언저리에 한데 엉기었다
그것이 일시에 오그라들어
목소리는 오히려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말하고 또 말해도 마침내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넘치는 빛 속의 침묵이었다
(‘예감’ 3연)
심연
심연은 사건이다. 모든 감각이 바뀌는 사건이다. 아름답다고, 멋있다고, 맛있다고, 고귀하다고 여겼던 모든 판단의 근거가 사라지는 사건이다. 더 이상 이전의 기준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건은 매우 직접적인 체험 가능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에서부터, 어떠한 관련도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등에서 겪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기존에 신뢰하고 꿈꾸었던 것들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절대적인 믿음까지도 가졌던 가치의 기준들이 모두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참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통하여, 그 무고한 희생자들을 통하여 기존의 감각이 얼마나 왜곡되게 사물을 감지하고 판단하고 있었는가를 펼쳐 보이고 들이대는 것이다. 심연은 그 사건에 대한 책임과 실천적 답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열리는 새로운 전환의 출구와도 같은 것이다.
한 사건을 통하여서도 기존의 근거들이 파열되고 사라지는, 그리하여 더 이상 이전의 상태로 감각하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을 겪어도 기존의 감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심연에 이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찌보면 심연은 수많은 실패와 무고한 희생의 인연이 선사한 값진 보물과도 같다. 사라진 근거로 모든 판단이 보류되거나 바뀌는 사건을 통하여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기존의 근거를 파열시키고 떠나보내고 떠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감각의 세포가 자라,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관계들에 관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공간적 이동이나 붙여진 이름들의 개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통한 새로운 존재를 만나는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둘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기존의 감각적 판단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새롭게 관계를 맺고 새롭게 호명하여 모든 관계들이 새롭게 맺어지는 축복인 것이다. 그것이 또 실패에 이른다 할지라도 기존의 실패와는 다른 또 다른 세계를 잉태하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심연은 공간적 추락이나 물리적 어둠의 상징성을 빌어서 표현하기 보다는 오히려 잃어버린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기존의 감각과 모든 판단을 떠나, 즉 사건이 던진 근거에 대한 질문과 성찰, 그 근거라는 것이 얼마나 협소하고 왜곡된 것이었는가를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선물인 것이다.
80년 광주민중항쟁은 20대 초반으로 접어드는 내게 과연 기존에 자신이 생각하고 믿어왔던 인간과 종교적 구원이 옳은 것인지,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 매우 혹독한 질문이었다. 뺨을 세차게 얻어 맞거나 몽둥이로 맞는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강도로 피비린내 나는, 인간이 만든 현실의 지옥으로 내던져지는 고통이었다.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인간이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선의와 사랑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그 순간 세상 모든 것들은 아름답지도, 귀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낯선 것들이 되어 버렸다. 빛나던 별들이 빛을 잃고, 아름답고 향기롭던 꽃과 자연의 빛깔이 모두 더 이상 아름답고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맛있던 음식에서도 아무 맛을 느낄 수 없고, 행복하게 느껴지던 노래의 흥얼거림도 사라졌다. 깔깔대던 웃음과 미소도 사라지고, 모든 이들에게 느꼈던 호의는 사라지고 경계의 대상으로 확장되어갈 뿐이었다. 누가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가려내고 말수를 줄이게 되었다. 나의 뒤에 누가 오는지, 나의 말에 누가 관심을 갖는지, 누가 나를 다른 이들과 구별짓고 색출해낼 것인지를 끊임없이 감지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누군가는 이런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똑같이 보고 느끼면서 나누었던 동일화의 안정감은 여지없이 산산조각나고 똑같은 물리적 거리에서도 가늠하기 어려운 심리적, 감각적 거리가 증폭되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 친구들 모두가 더 이상 이전처럼 대화하고 함께 할 수 없는 괴물이나 원수가 되기도 했다. 딸의 지적처럼, 어쩌면 오히려 그들이,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을 낯설고 기괴한 존재로, 매우 문제가 많은 인간으로 여겼을 것이다. 괴물이 되고 이방인이 되는, 자신이 먼저 추방자가 되기를 선택하고, 그것을 끝까지 밀어 붙이며 고집하는 사건인 것이다. 기존에 가장 가치있고 고결해 보였던 모든 가치들이 이제는 결코 화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가차없이 버려야할 쓰레기가 되는 순간이다. 쩍 갈라짐으로도, 다이아몬드가 잿더미로 변하는 것으로도, 환한 햇살이 깊은 어둠으로 바뀌는 것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순간들이다.
이러한 사건은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고,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던 뜻을 같이 했던 이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그것은 누군가의 잘잘못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미 그 관계 속에 있던 문제들이 소위 일종의 사건이라 불리는 것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나의, 너의, 우리의 결정, 행위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던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당연지사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을 무엇이라 이름붙이기 어렵다.
좋다거나 나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사건을 통하여 기존에 붙들고 살아 온, 관계를 유지한 근거에 대하여 다시 물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끊질기게 물고 늘어져 그 근거를 근본적으로 파열시키는 것이다. 본래 근거라 할 수 있는 것이, 절대적 진리로서의 근거란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심연은 변화의 당연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남을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사건을 무마하고 적당히 둘러대고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심연이란 있을 수 없다.
심연은 되돌아갈 수 없음이다. 되돌릴 방향이 사라지는 것이다. 정해지고 의지할 방향이나 근거가 파열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혹은 다시 근거를 마련하고 길을 내어야 하는 질문이고 책임을 답하는 사건이다. 새로운 가능성,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가치들을 발견하는, 마치 이전까지 상상하지도 못했던 세계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열리는 사건인 것이다. 기존의 근거들,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 어찌보면 오히려 더욱 자신이 적극적으로 초래한 노력들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낯선 괴물같은 존재로 기존의 가치체계와 관계 속에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고통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선택이자,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버티기이다.
심연이라 불리는 사건의 중심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감각, 새로운 만남은 예측하여 계획하거나 의도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의 장 속에서 벌어지는 관계에서의 사건들이 서로 다시 교류하고 맺어지는 과정에서 예측 불가능한 흐름이 열리는 것이다. 매우 매력적이고 두렵기도 한 사건인 것이다. 그 과정들이 어떤 세상을 볼 수 있는 신체, 관계를 만들어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열리는 세상을 겪으며, 또 다시 도래할 수 있는 사건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용기, 기대, 고집할 유일무이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리하여 절대적 진리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만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의 것이 아닐까.
심연은 축복이다. 복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것이다. 본래 무한하고 무상한 변화를 놓치고, 고착된 근거들에만 의존하여 세상을 감각하고 판단하고 지어내는 것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다. 그 기회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열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무한한 변화 속에서 열리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고착되고 상주하려는 것들에 와서 부딪히고 파열하는 특이성의 강도들로 인하여 생성되는 새로운 장이다. 80년 광주에서 탱크가 무참하게 살아 있는 자들을 뭉개고 지나가며, 무차별 총살을 하는 것만으로는 하나의 사건일 수 없다. 그 참혹한 공포와 억압에 저항하는 연대와 용기의 강도, 그 특이성이 내는 파열의 틈인 것이다. 제압하는 강도를 넘어서는 강도로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틈새의 빛, 그 강도에 이끌여 모여드는, 적극적으로 그 틈새의 흡인력으로 빨려 들어갈 준비와 노력을 하는 새로운 특이성의 강도가 만나 벌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지구상의 수많은 특이성의 강도들이 내어준 심연의 틈을 통하여 스승이라 불리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새로운 문들을 늘 열어 젖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파열의 강도를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자 하는 할수록, 기존의 근거들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매달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인 김시종의 특이성, 시인의 감각으로 발견하고 관계를 맺은 수많은 특이성들이 강사 이진경 선생님의 특이성, 그 감각을 통하여 새로운 심연으로 내딛을 수 있는 틈, 그 빛자락을 열어 젖히고 있다.
산
들썩이는 깊은 이 밤
수백 수천의 뱀을 품어
물어뜯긴 대지의 독(毒)은 없는가
산이여
(‘산’ 5연)
비상
가령 번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비가 있어
나뭇가지 그대로 말라 버렸다 한들
날개는 서서히 절반의 몸인 채로 바람과 어우러지고
주변에 비상(飛翔)을 꽃가루처럼 흩트리며
잎새 깊숙이 스러지겠지
(‘화신’ 1연)
얼룩
얼룩은
요란한 겉치레를 즐기지 않는다
그 자체의 오점(汚點)인 듯한 처우에는
얼룩 자신의 내력이 동조하지 않음이다
얼룩은 흔적이 눌러 박힌 신념이다
번져 나간 표상에만 집착해
비렁뱅이의 개선을 비웃고 산다
강조는 이처럼 말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얼룩은
한 패거리 짓는 묵계로도 된다
의외로 바로 지척에서 점잔 빼며
눈동자 하나를 수월히 낚아챈다
(‘얼룩’ 2, 3, 4연)
전조의 표징
얼룩은
전조(前兆)의 표징이다
어디건 간에
일단 번졌다 하면
한 점 명확한 의지로 자리를 차지한다
(‘얼룩’ 1연)
◼ 2016년 10월, 이진경 선생님을 통하여 한 시인을 알게 된다. 그리고 2017년 1월 김시종 시에 관한 강연을 들으며 작업의 주제를 급히 변경하게 되었다. 시인의 시가 그의 삶의 궤적이듯이, 그림 또한 당시의 작가의 삶의 고민과 그가 접하는 세계를 담는 것이기에, 늘상 그랬듯이 나의 작업 또한 당시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것들을 회화적 언어로 소화시키고 생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어록을 주제로 한 작업의 전시는 나중으로 미루게 되었다.
곧 한국어로 번역되어 발간될 김시종의 시집들과 더불어, 김시종 시인의 시에 담긴 시인의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보고를 감동적이고도 새로운 언어로 풀어준 이진경 선생님의 강의록 출간을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곱번째 개인전은 2008년 번역된 김시종 시선집 <경계의 시>(김시종 지음, 유숙자 옮김, 小花)에 실린 <화석의 여름> 시집 편에 실린 11편의 시를 주제로 작업하였다. 좋은 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미지, 색채를 지니고 있다.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이름으로 지칭하여 만들기 어려운 형상을 마주치게 한다.
시적인 세계 뿐만이 아니라, 그 시를 읽는 이들 각자의 영역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접하고 창작할 수 있는 ‘심연’의 장을 열어주신 것에 대하여 김시종 시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시인 김시종의 약력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나 원산, 제주, 광주 등지에서 자랐다. 조선어를 모르는 황국소년으로서 1945년 제주도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1948년 ‘우편국 사건’ 실패 후 제주도를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 이후로 일본에서 시 창작 및 [진달래] 창간 등의 활동을 한다.
1955년 시집 <지평선> 발간 이후, 1957년 <일본풍토기>, 1970년 <장편시집 니이가타>, 1978년 <이카이노 시집>, 1983년 <광주시편>, 1986년 <재일의 틈에서>, 1992년 <원야의 시>, 1999년 <화석의 여름>, 2001년 김석범과 함께 <왜 계속 써왔는가, 왜 침묵했는가: 제주도 4.3 사건의 기억과 문학>, 2004년 윤동주 시를 번역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출간, <내 삶과 시>를 발간한다. 2005년 <경계의 시>, 2007년 <재역 조선시집>, 2010년 <잃어버린 계절>, 2015년 <조선과 일본에 살다>를 발간한다.
1986년에는 제 40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1992년 제25회 오구마 히데오 상 특별상, 2011년 제41회 다카미 준 상, 2015년 제42회 오사라기 지로 상을 수상한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특별조치로 1949년 이후 4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제주도에서 부모님의 묘소를 성묘한다. 2000년 4.3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3년 김시종은 한국적을 취득한다.
◼ 두통과 내게 찾아 오는 통증들은,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내’가 ‘내 마음대로 한다’는 오해와 자만에 대한 자각과 질문들이다. ‘나’라고 물질적으로도 규정되는 한계들인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확연한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나’라고 불리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존재들, 세균과 박테리아들이 공존하는 장이다.
◼ 보통 ‘보았다’거나 ‘볼 수 있다’고 할 때, 그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무엇을 보았는지, 왜 그렇게 보이는지를 물을 수 있다. 흔히 볼 수 있다고들 하지만, 과연 무엇을 본 것일까? 그리고 그림은 무엇을 그리는가? 본 것, 보았던 것, 보고 있는 것, 기억하는 것. 그러나 과연 ‘피부의 깊이’에까지 이른 것인가?
◼ 작은 점들처럼 흩어지거나 덩어리져 모여 있거나 어느 것 하나 일정한 거리와 규칙적인 위치들을 두고 있지 않은 붓의 흔적들은, 먹물로, 물감으로, 다양한 재료들로 드러난다.
◼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보았다 하는가 이미 그것은 사라져 나는 이미 그것을 보지 못한다.
◼ 늘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나’ 무수한 생명들로 이루어진 ‘나’ 굳이 ‘나’라고 할 무엇이 있는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을 품은 ‘나’
◼ 시인을 따라 이카이노의 다리를 건너고 수긍하기 어려운 이유들로 바다에 잠긴 죽음들을 들여다 보고. 19살 소년이 이국땅에 내딛었던 발걸음의 무게를 느껴본다. 틈새. 사태의 전언.
입멸
하여, 나비의 부서진 조각은
이미 나비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춤이나 장식 이 모두에서 스스로 물러나
흔들리는 대로 그 자리를 줄곧 지키며
오로지 자신의 입멸을 응시할 뿐
(‘화신’ 2연)
이단
치켜 오르는 처마 끝에서라면
끝내 종유(鍾乳)의 물방울로도 되었으리
어쩌다 거꾸로 융기하여
도시의 붕괴에는 통증조차 못 미치리
얼룩은 규범에 들러붙은
이단(異端)이다
선악의 구분에도 자신을 말하지 않고
도려낼 수 없는 회한을
말(언어) 속 깊숙이 숨기고 있다
(‘이단’ 5, 6연)
돌의 꿈
돌인들 생각에 잠겨 꿈을 꾼다.
사실 내 가슴속엔
그 여름날 터져 나온 아우성이
운모 조각처럼 응어리졌다.
(‘화석의 여름’ 1행~4행)
화석의 여름
돌인들 생각에 잠겨 꿈을 꾼다.
사실 내 가슴속엔
그 여름날 터져 나온 아우성이
운모 조각처럼 응어리졌다.
돌이 된 의지가 부서진 세월이다.
양치식물이 음각(陰刻)을 새긴 건
돌을 끌어안은 고생대의 일이다.
군사경계선이 놓인 잘록한 지층에선
지금도 양치식물이 태고의 모습으로 얽혀 있다.
꿈마저 그곳에선
화석 속의 곤충처럼 잠들어 있다.
그 돌에도 스치는 바람은 스친다.
그리하여 어느 날 참으로 불쑥
탄화한 씨앗이 움틔운 가시연꽃을 보듬어
오랜 침묵을 한 방울의 목소리로 바꾸는 바람이 된다.
그늘진 계절은 마침내
바람 속에서 퍼져 나간다.
(‘화석의 여름’ 1행~17행)
화구호
새가 영원의 비상을 화석으로 바꾼 날도
그렇게 저물어 덮이었다.
수많은 날들 해가 지고
만날 수 없는 아쉬운 석양을 고향 사투리로 가리며
말 더듬는 자의 등 뒤에서
바다는 고요히 하늘과 만났다.
이미 입멸의 때를 우리는 갖지 않는다.
온갖 반목(反目)이 불길로 타올라
연분홍빛으로 엷어지는 어둠의 침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시커먼 체념은 돌로 돌아가
바로 그 돌에 소망은
꽃잎 한 장으로 박혀야 한다.
생각하면 별인들 돌의 허상에 불과한 것.
화구호(火口湖)처럼 내려선 하늘 깊숙이
홀로 남몰래 가슴의 운모를 묻으러 간다.
(‘화석의 여름’ 20행~34행)
내가 눌러앉은 자리
내가 눌러앉은 곳은
머언 이국도 가까운 본국도 아닌
목소리는 잦아들고 소망이 그 언저리 흩어져 버린 곳
애써 기어올라도 시야는 펼쳐지지 않고
깊이 파고들어도 도저히 지상으로는 내려설 수 없는 곳
그럼에도 그럭저럭 그날이 살아지고
살아지면 그게 생활이려니
해(年)를 한데 엮어 일년이 찾아오는 곳
거기선 모든 게 너울거리고 떠들썩한데
소란 끊긴 여기는 바람 한 점 없다
그런데도 한결 흔들리고 있는 건 바로 나
바람은 어쩌면 깊은 사념 속에 살랑댔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 끝없는 희구의 요람인 것을
내가 흔들리고 내가 흔들고 성장하는 나를 내가 기다린다
그렇듯 시절은 내게서 멀어
유독 내게 멀찍이 동떨어져 머언 현재도 아니다
(‘여기보다 멀리’ 1, 2연)
틈새
애당초 눌러앉은 곳이 틈새였다
깎아지른 벼랑과 나락을 가르는 금
똑같은 지층이 똑같이 움푹 패어 마주 치켜 서서
단층을 드러내고도 땅금이 깊어진다
그걸 국경이라고 장벽이라고도 한다
보이지 않는 탓에 평온한 벽이라고도 한다
거기엔 우선 잘 아는 말(언어)이 통하지 않아
촉각 그 심상찮은 낌새만이 눈과 귀가 된다
내가 눌러앉아 버린 자리는
백년이 고스란히 생각을 멈춘 곳
백년을 살아도 생각에 잠기는 날은 아직
어제 그대로 저물어 가는 곳
고국에 머얼리 타향에 머얼리
그렇다고 그토록 동떨어지지도 않은
늘상 되돌아오는 지금 있는 곳
여기보다 멀리 보다 바로 여기에 가까이
(‘여기보다 멀리’ 3, 4연)
불면(不眠)
역시 메말랐다
메마른 꿈에 주름진 것이 나이(齡)다
하여, 후회는 밤눈에도 푸르스름하니 뿌옇다
이제 빛이 아침이라는 말은 내게 없다
얼어붙은 뿌리가 가령 교목을 키웠다 한들
내게 신기함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밤새 바람이 질주하고 나무들은 목청껏 소리를 내지른다
소리도 없이 꽃술을 흩어 아리땁지도 않은 꽃이 내 안에서 흔들린다
반목(反目)은 잠도 주지 않는 도깨비불이다
밑둥치에 주저앉아 눈을 껌벅이고 있는 건 바로 나다
놓쳐 버린 꿈이 밤의 심지에서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불면’ 5, 6, 7연)
붉은 혓바닥
이런 밤 뱀은 어찌 지내려나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울적한 날
뱀은 어디서
어떤 품새로 뾰족한 대가리 쳐들고 있으려나
도시가 무너진 날
화염에 쫓기던 날
마음이 허기져
기어코 벗이 미쳐 버린 날
책상 한 귀퉁이에서 해도(解雇)를 견딜 때
잠자코 놓인 어머니의 얇다란 편지에 눈길 머물 때
아내가 말문을 닫고
괜스레 고향이 멀어질 때
뱀은 어찌 지내려나
번득이는 눈알은 어딜 응시하고
낌새의 무엇을 붉은 혓바닥은 더듬으려나
(‘산’ 1, 2, 3, 4연)
이카이노 다리
아버지는 손에 이끌려 건넜다
여덟 살 때.
나무 향 풋풋한 다리
강물 위에는 무수한 별이 떨어져 있었다.
전등불 환히 눈부신 끝자락 일본이었다.
스물둘에 징용당한
아버지는 이카이노 다리를 지나 끌려갔다.
나는 갓 태어난 젖먹이로
밤낮을 뒤바꾸어 셋방살이 엄마를 골탕 먹였다.
소개(疎開) 난리도 오사카 변두리 이곳까진 오지 않고
저 멀리 도시는 하늘을 태우며 불타올랐다.
나는 지금 손자의 손을 잡고 이 다리를 건넌다.
이카이노 다리에서 늙어 대를 이어도
아직도 이 개골창 그 흐름을 알 수 없다.
어디 오수가 이곳에 썩어
어느 출구에서 거품 물고 있는지
가 닿는 바다를 알지 못한다.
오직 이카이노를 빠져나가는 것이 꿈이었던
두 딸도 이젠 엄마다.
나도 바로 예서 마중 나올 배를 기다려 늙었다.
그래도 머잖아 운하를 거슬러 하얀 배는 다가오리.
사랑해 오사카
모두가 사랑하는 오사카, 변두리의 끝 이카이노.
(‘이카이노 다리’ 1, 2, 3연)
화관
메말랐다
꿈에서마저 일상이 넘쳐난대야
굳이 눈뜰 일 없는 나날이다
차라리 잠일랑 내팽개쳐 두고
꿈은 눈을 뜬 채 꾸기로 하자
서서히 다리가 뻗치고
그 끝에서 촉수 같은 흰 뿌리가 내리는
겨울 양귀비다
조여드는 냉기마저 아랑곳없이
어둠을 뚫고 받침대를 세워
밤보다 짙은 화관(花冠)을 심야에 새긴다
아무도 봐주지 않을 꽃이 꽃피운다
아득한 나의 지조 속에서 피어난다
무심히 그저 굴거리나무만 한 삶이고자 했건만
주의도 사상도 옹고집도
모노코롬으로 한결 선명해진다
(‘불면’ 1, 2, 3, 4,연)
바람의 바다
그럼 다녀오기로 하자
메울 수 없는 거리의 간격을
손으로 더듬어 눈여겨보기로 하자
먼 데 바라볼수록
석양은 언제나 산자락에 걸리고
저 너머 구름 끄트머리에도
함초롱히 저무는 바다가 있어
한달음에 내달아 무엇이건
나는 타 넘어 건넌다
풍토조차 세월에 나부끼는가
늘상 울어대는 저 솔바람마저
서낭당에서는 이미 속삭이지 않는다
내게서 도망친 세월은 여전히 원경(遠景)으로 매달렸는데
못내 망향을 들썩이는 나를 닮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바라보는 위치에서 사그라졌다
그래도 나가 봐야지
누렇게 뒤엉킨 기억이
어쩌면 아직 그대로 그 자리에 바래고 있는지도
숲은 목쉰 바람의 바다였다
숨죽인 호흡을 짓눌러
기관총이 베어 낸 광장의 저 아우성까지 흩뿌리며
시대는 흔적도 없이 엄청난 상실을 실어 갔다
세월이 세월에 방치되둣
시대 또한 시대를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가리’ 1, 2, 3, 4연)
이방인
영영 빈집으로 남은 빗장을 벗겨
요지부동의 창문을 부드러이 밀어젖히면
갇힌 밤의 사위도 무너져
내게 계절은 바람을 물들여 닿으리라
모든 게 텅 빈 세월의 우리(檻)
내려 쌓이는 것이 켜켜이 쌓인 이유임을 알 수도 있으리라
송두리째 거부되고 찢겨 나간
백일몽의 끝 그 처음부터
그럴듯한 과거 따위 있을 리 없어
길들여 익숙해진 재일(在日)에 머무는 자족으로부터
이방인인 내가 나를 벗어나
도달하는 나라의 대립 틈새를 거슬러 갔다 오기로 하자
그렇다, 이젠 돌아가리
노을빛 그윽이 저무는 나이
두고 온 기억의 품으로 늙은 아내와 돌아가리
(‘돌아가리’ 7, 8, 9연)
국화꽃 씨앗
아득한 시공을 두고 떠난 향토여
남은 무엇이 내게 있고 돌아갈 수 있는 무엇이 거기 있나
산사나무는 여전히 우물가에서 열매를 맺고
뻥 하니 뚫린 문짝은 어느 누가 어찌 손질해
그 어느 봉분 속에서 부모님은 흙 묻은 뼈를 앓고 계시는가
서툰 음화 흰 그림자여
아무튼 돌아가 보기로 하자
오래 인적 끊긴 우리 집에도
울타리 국화꽃이야 씨앗 영글어 흐드러지겠지
(‘돌아가리’ 5, 6연)
◼ 붓을 펼치고 오므리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으로 형성되는 형태 그대로가 획의 모양과 기세를 갖는 것이 서예이다. 부드러운 털에 먹의 장력을 이용하여 지면과의 마찰, 저항을 이겨내는 것으로서 힘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방향의 전환을 통해 탄력을 얻고, 그 얻어진 탄력의 힘으로 털을 모으고 굵기의 조절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방향의 전환, 그 순간 얻은 마찰의 힘, 그 에너지를 지면과 붓의 사이에 가두어 두지 못하고 잃게 되면 붓에서 힘이 빠져 나가고 펼침과 오므림의 운동을 의도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매우 미묘한 붓의 운용의 차이가 획의 모양과 기세를 낳는다. 서예는 부드러운 털과 먹이라는 액체, 얇고 찢어지기 쉬운 종이, 즉 어찌보면 가장 부드럽고 약한 요소들이 수직으로 만나 벌이는 새로운 에너지 형성의 장이다. 붓을 잡는 손의 위치 또한 그러한 에너지를 증폭시키고 제대로 발현시키는 중요한 물리역학적 요소이다. 붓의 운동의 흔적 그 자체가 획의 모양을 이루고 글씨의 결구를 이룬다. 탄력. 종이의 저항, 마찰. 획의 마무리 운동은 최대한 짧게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탄력을 얻어서 다음 획으로의 운동을 위하여 붓의 펼침을 다시 오므려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획을 만드는 과정은 최대한 경제적인 운동, 즉 불필요한 운용을 줄여야만 한다.
◼ 획의 두께는 붓의 펼침을 통하여 표현된다. 그리고 지면과 직각방향으로 붓을 이끌어 감으로써 얻은 탄력으로 중봉(中鋒)의 획을 긋는 것이다. 동양예술을 서양예술과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그 핵심은 붓의 운용에 있다고 할 것이다.
‘붓 길들이기’. 지금 현재(2017년) 동묵헌에서 쓰고 있는 붓이 처음 만났을 때는 부드럽고 기운이 없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투덜대기도 했다. 붓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그러나 붓은 그것을 쓰는 주인이 길들이기 나름이다. 쓰면 쓸수록 힘을 얻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붓이 힘을 얻도록 하려면 제대로 그 탄력을 이용, 방향의 전환과 붓의 꼬임을 풀어 주는 것이다. 즉 붓이 꼬이지 않도록, 소위 ‘꺾어 쓴다’는 것을 제대로 정확하게 해주면 해줄수록 붓에 탄력이 붓고, 즉 힘이 생긴다. ‘길들인다’는 표현은 말에게도 자주 쓰는 표현이다. 말도 잘 다루지 못한 채 속도만을 낸다면 고꾸라지고 말 주인이 말에게서 튕겨져 나가 쓰러질 것이다.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마장마술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마장마술이란 다양한 속도와 동작을 주인과 말이 하나가 되는 호흡으로 해내는 것이다. 말을 잘 탄다는 것이 말의 동작, 그것의 리듬과 특성들을 잘 파악해서 기수와 말의 호흡이 일치하고 말의 운동이 갖는 특성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여 그 속도의 증감과 방향의 전환을 이용하여 달리고 멈추는 것과 같이, 서예 또한 붓과 그 주인이 하나가 되는 경지로 나아가야 골기(骨氣)가 있는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마장마술에서 말의 동작을 조율하는 손과 다리 등의 움직임은 되도록 보는 이에게 드러나지 않을수록 높은 점수를 받으며, 말 또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러울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붓을 사용하는 것 또한 붓을 움직이되 잘 드러나지 않고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동작을 통하여 예술가와 붓의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붓의 탄력을 형성하고 운용하는 동작들의 순간은 매우 짧고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쉽게 포착하기 어렵다. 마장마술의 경우 훌륭하고 실력있는 코치가 좋은 말을 훈련시켜주고 선수가 타면 훨씬 더 쉽게 말을 다룰 수 있다고 한다. 서예의 경우도, 붓을 잘 운용하는 스승이 붓을 일정 시간 사용한 후 붓을 사용해보면 붓에 힘이 들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붓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길들여지고 그 수명 또한 달리한다.
‘붓 길들이기’. 어쩌면 동양예술의 가장 근본적이고 큰 특징은 부드러운 붓을 이용하여 먹이나 물감을 가지고 그 붓의 운동의 흔적을 다양한 재료 위에 표현하는 것이다. 때로는 돌이나 나무라는 강한 물성을 갖는 재료 위에 칼로 옮겨지기도 할 정도로, 붓의 운용을 통한 표현은 부드러움과 강함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종이 뿐만이 아니라 캔버스나 다양한 메디움을 사용한 바탕위에도 아크릴붓이나 유화붓, 수채화붓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획의 운동을 동양화붓을 사용하여 표현할 수 있다.
붓의 탄력은 잘 사용하면 할수록 형성된다. 주기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붓을 방치하게 되면 길들인 붓의 탄력을 상실하여, 다시 그 탄력을 형성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털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는 가느다란 원통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 표면을 둘러싼 요소들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며 주변의 환경에 따라 수축이완의 성질을 띄게 된다. 붓으로 사용하는 부분은 모간 부분으로, 털의 줄기로서 죽은 부분이다. (*털의 특징을 이용한 포유동물의 분류 및 활용 방안에 대한 탐구 참조.)
◼ 서예가 정신 혹은 마음의 수양 상태를 드러내주는 예술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붓의 운용에 있어서의 호흡의 일체라는 특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붓을 다스리는 것에 집중하여 그 완급의 조절을 하는 과정은 바른 자세와 호흡의 조절 등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털에 먹물을 먹임으로서 그 사용하는 사람에 따른 붓의 골기가 형성된다는 것은 수천 년 동안 많은 이들을 매료시킬 만큼 매혹적인 특징인 것이다.
축복
올해도 결국 연하장은 쓰지 않았다
가다듬을 새도 없이 해(年)는 오고
인사는 그대로
고향을 떠났을 때 그대로인 탓이다
어느 결에 말(언어)조차 옷을 갈아입고 말았다
기수사(基數詞)마저 고리짝 아래 장뇌에 절었고
인사 한마디 여기선 이미 겉치레로만 건네질 뿐
하여 다정한 벗일수록 말이 없다
썩은 낙엽에 숨 쉬는 대지처럼
수북한 연하장 더미 깊숙이 잠들어 있는 건 나의 축복이다
떠밀려 숨어든 모어(母語)이자
두고 온 말을 향한 은밀한 나의 회귀이기도 하다
(‘축복’ 1, 2, 3연)
예감
밤의 정적을 깨고 전화가 울린다
누군가 다급함을 알리는데도
거리의 창은 입을 다물었다
(‘예감’ 1연)
하얀 의지의 꽃잎
그건 분명
하얀 의지의 꽃잎이었을 게다
힘껏 내저을 수밖에 없었던 자의 전율이
눈(眼) 속을 미처 지나지 못한 채 떨고 있다
(‘예감’ 4연)
어제의 오늘이 지금이며
어제의 오늘이 지금이며
지금이 고스란히 내일이라면
미래도 과거도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 말할 수 있겠지
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풍습 한 가지나마 서로 나눈다면
타향에도 뿌리내린 고향이 있었노라
나 자신에게 말해도 좋겠지
멀어진 나라가 똑같다면
한가위 쳐다보는 달도 똑같겠지
천년의 소원을 비는 달맞이 소망이 똑같다면
(‘똑같다면’ 3, 4, 5연)
지금이 고스란히 내일이라면
어제의 오늘이 지금이며
지금이 고스란히 내일이라면
미래도 과거도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 말할 수 있겠지
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풍습 한 가지나마 서로 나눈다면
타향에도 뿌리내린 고향이 있었노라
나 자신에게 말해도 좋겠지
멀어진 나라가 똑같다면
한가위 쳐다보는 달도 똑같겠지
천년의 소원을 비는 달맞이 소망이 똑같다면
(‘똑같다면’ 3, 4, 5연)
허물
위엄을 갖춘 표본의 진열로부터
아이가 흔드는 곤충망의 정서로부터조차
비상의 화신은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한결같이 나비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메말라 간다
소리 하나 떨리지 않는
허물로 남아
(‘화신’ 3연)
Profile
고윤숙 / KOH YOON-SUK
선화예술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서양화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