牨 涉 月 出

강 섭 월 출

물소는 거닐고 달은 뜨다

KHO YOONSUK

The 9th Solo Exhibition

牨 涉 月 出

강 섭 월 출

물소는 거닐고 달은 뜨다

KHO YOONSUK

The 9th Solo Exhibition

2018. 10. 2 (화) — 10. 9 (화)

Opening Reception
10. 3(수)|
05:00 p.m. – 07:00 p.m.

관람시간
월 ~ 일10:30 a.m. – 05:30 p.m.

 

불일 미술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10 (사간동)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

Open Hour
10:30 a.m – 05:30 p.m.

철학자 이진경 선어록을 읽다 | 법보신문
수많은 덧칠·무너트린 형체로 참모습 보이다 | 법보신문
시인 김시종 편지에 회화적 언어로 답하다 | 법보신문

 

서양화와 서예로 꽃피우는 화엄세계

고윤숙 작가

불일미술관 학예실장 여서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고윤숙 작가는 어느 날 서예를 하게 되었고 서양화에 서예의 획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고정불변한 어떤 것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걸 표현할 수 있으면 좋은데 어렵다. 내가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상(相, 象)이 된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이라는 것은 굉장한 선입견이고 편견이라는 고윤숙 작가는 상 아닌 상, 상 너머의 그 무엇을 그림으로 표현해내고자 수없이 덧칠하고 일부러 형태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한다. 인간의 눈으로, 인간의 감각으로 감각한 것이 아닌 그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한다. 이렇듯 작가의 세계에는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가 함께 하고 있다.

인연이 자신을 밀어준다고 생각하는 고윤숙 작가는 이번 전시도 어떤 인연이 밀어준 것이라 했다. <수유너머104>의 이진경 선생님이 고윤숙 작가가 15년간 소속해서 활동하고 있는 이화여대 열림서예연구회의 단체전을 보시고, 다른 회원들과 <수유너머104>에 서예동아리를 만드셨고, 작가는 그 동아리 회원들에게 서예 지도를 하고 있었다. 2017년부터 이진경 선생님이 법보신문에 선어록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며 삽화를 부탁해왔다. 평소 마음이 어지럽거나 괴로울 때면 스님들의 글을 혼자서 찾아보던 작가는 ‘이번 기회에 나도 선어록을 읽어 보자.’하고는 그 제의를 수락했다.

그렇게 시작된 삽화는 매번 시간을 다투고, 마감 시간에 쫓겨 밤샘 작업을 하게 했다. 삽화의 특성상 원고가 넘어오면 그 글을 읽고 작품을 구상해야 한다. 그걸 매주 하노라면, 작업할 시간은 매번 2~3일 정도였다. 보내 온 원고를 출력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읽고 또 읽고, 모르는 것은 배워가고, 메모를 해 가며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킨 후 주제어를 잡고 이미지를 떠올리고 찾아서 다시 작품으로 구상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과정은 1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려놓은 작품을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염려되기도 했지만, 마감 시간에 맞춰 작업을 완성해갔다. 그렇게 모인 작품들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이번 전시가 기획되었다. 자신의 안에 그대로 쌓여있는 그림들을 내보내어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고윤숙 작가는 말한다. 자신이 작업한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고 하는 작가는 완벽하진 않지만 내보내서 독립시키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서양화에서 서예로, 그리고 이제는 캔버스가 아닌 종이에 붓으로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다음의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동양화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종이에 붓으로 그리는 것을 하고 싶지만 두려움이 있다는 작가는 지금은 남의 문장을 빌어와서 낙관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문장을 만들고자 한다. 전통적인 동양의 시서화가 그러하듯, 주제나 풍경에 대해 그림을 그리면 옆에 시나 문장을 쓰고 낙관을 찍는 방법으로 작업하고자 한다. 나아가되 서양화를 했던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러면서 동양화 전통에 있는 미학적인 특수성을 체험하고 연구하고 싶다고 말하는 고윤숙 작가는 360°로 쓸 수 있는, 동양화의 붓이 가지는 엄청난 매력을, 운필의 묘를 서양화적 방법으로 끌어내고자 한다. 동양화, 서양화의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것과 저것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의 꽃으로 피워내는 작가의 화엄의 세계가 오래, 그리고 널리 사람들의 곁에 함께하기를 바래본다.

늦은 밤,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이웃냥이들의 제2밥상을 차리는 아파트 건물의 모퉁이가 보인다. 제1밥상은 근처 공원 숲에 차려진다. 늘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면서도 눈길은 기다리는 이웃냥이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핀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침침한 눈이 피로에 무겁게 감기려 하다가도, 밤 11시 이전에는 밥상을 꼭 차려줘야지!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나고 죽는 것까지 책임지지는 못하지만, 살아서 그 자리로 밤마다 이웃냥이들이 오는 한,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 누구도 ‘너 왜 이웃냥이들 밥을 안주냐?’고 힐난하고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그저 태어나 이름도 없이 떠난 지 오래된 이웃냥이들과의 만남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켜 놓은 것이다.

실은 얼마 전 며칠 간 이웃냥이들의 제2밥상을 차리지 ‘않았었다’. 아파트 현관 공지판에 시끄럽게 울고 분뇨물이 냄새나는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지 말라는 공지가 붙었었다. 고양이는 길 위에서 볼 일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한판 붙어 어떤 사람들의 의견인지,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묻고 한 결정인지를 따지고 싶었지만, 소심하게도 혼자 속으로 꼬리를 내려버렸다. 공지문을 몰래 떼어와 집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 고작 우선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턱시도(입 주변과 다리 부분만 흰 검은 색 고양이를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부르곤 한다)가 텅 빈 밥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마주친 나에게 달려오며 엄청난 소리로 ‘야옹 야옹 야용~!’을 외쳤다. 속이 뜨끔했다. 그리고 부끄럽고 매우 미안했다. 속으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며 급히 밥과 물을 챙겨 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챌까 작은 턱시도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애원을 하며 참치를 섞은 사료와 물로 밥상을 차리고 서둘러 길 건너로 피신한다. 그리고 주변에 눈치 챈 사람이 없는지를 살피면서 작은 턱시도가 잘 먹는지를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공지문 덕분에, 남편에게만 맡겼던 이웃냥이들 밥상차리기의 일부를 다시 맡기로 했다. 공원의 밤길이 무섭다는 이유로 한동안 이웃냥이들의 밥상차리기를 하지 않았었기에, 얼마 살지 못하고 떠난 이웃냥이들에 묘상착의에 대해서는 남편이나 딸로부터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만나 보지 못하고 지냈다. 우리 가족들은 하루 동안 이웃냥이들을 몇 마리 만났는지를 자랑하며 행운의 징표로 삼곤한다. 이웃냥이들도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들이라고도 믿는 것이다.

밥을 나눠 먹으면 좋은 것은, 어둠 속에서도 어린 턱시도가 먼저 와서 밥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음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사랑하는 애인이나 가족은 금새 눈에 띄듯이, 우리집 막내 여름이를 닮은, 여름이의 친척뻘 되는 것 같은 작고 발랄하고 재빠른 치즈빛 아기 이웃냥이의 번개 같은 달리기도 포착해낼 수 있다. 작은 턱시도의 삼촌이나 할아버지뻘 되는 것 같은 크고 점잖은 턱시도가 뒤에 조용히 앉아 있어서 깜짝 놀라며 밥상 앞을 비켜주는 경험도 할 수 있다. 이 동네로 이사 오자마자 만났던 치즈빛 이웃냥이들은 벌써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 후로 삼색이, 고등어, 치즈빛, 심지어 러시안블루 이웃냥까지 수많은 이웃냥이들이 우리와 함께 살았다.

특히 최근에는 외출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외출냥 호두와도 인연이 닿았다. 밥을 주러 오가는 남편에게 다가와 발라당 애교도 펼치곤 한다. 매우 걱정하던 딸이 목거리에 적힌 전화번호로 고양이의 안부를 물었다. 호두의 엄마는 나가고 싶어 하는 호두를 위해 문을 열어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다행히도 우리가 며칠 간 가슴아파하며, 누가 키우던 고양이를 버렸느냐고 울분했던 시간이 한순간 사라진 것이다.

나의 아침은 나와 가족들, 거북이 토토와 고양이 담솔, 소담, 꼬미, 여름이의 밥을 챙기며 시작되고, 나의 밤은 이웃냥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지내다가 밥을 먹으러 오는지 살피며, 밥상을 차리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특히, 며칠 전, 왼쪽 뒷다리를 땅에 딛지도 못할 정도로 절룩거리면서도, 하악질과 야옹야옹을 반복하며 재촉하던 작은 턱시도가 다시 예전처럼 재빠르게 달리고 도망 다닐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일이 밤이 깊어질수록 기원하는 일이 되었다.

눈길과 마음, 먹을거리를 함께 나누지 않으면, 길면 길다할 수 있는 세월동안,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시간 동안, 오직 자신만을, 가족만을 걱정하며 살다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감지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무수한 생명들과 존재들이 순간순간 생멸을 함께 하며 나를 살게 하고 있다. 내가 나를 잠 깨워 밥을 먹이고 일하게 하고 그림을 그리게하고 글씨를 쓰며 공부를 하게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무수한 인연들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정신을 차리게 하고, 지혜를 따르게 하며, 앞서 나고 죽음으로써 삶뿐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낯선 것이 아닌 나의 길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웃냥이들을 도둑이라 여기고 길에서 태어났기에 언제 죽어도 아무 상관없는 존재로 여기며 그 울음소리가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밥을 줄 수 있는 권리조차도 개입하고 강압적으로 제지하려는 것은, 실은 그들의 마음이 여러 욕망으로 시끄러워서이지 않을까. 지나가는 혹은 영역싸움으로, 혹은 짝짓기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우리들의 분노와 욕심으로 가득 찬 무수한 말들과 행위보다도 아름답고 멋지다는 것을 평생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여기는 것이 비단 고양이 뿐이겠는가.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과, 나무에 사시사철 날아들고 우짖는 새들과, 곤충들과, 발밑의 개미들까지,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생명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눈과 마음을 마주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헤아리지 못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사회, 지구와 우주가 매순간, 언제나 무관하지 않고 잇닿아 서로가 서로를 나고 죽게 하고 있음을 매순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쌀을 씻어 밥을 지을 때나, 과일을 깎아 먹을 때나, 발길을 옮겨 걸을 때나, 잠들 때조차도 늘 조심하고 감사하며,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도 필요 없는 무수한 존재들이 밀어주고 당겨주는 힘으로 지난 시간도 그림이란 것을, 붓글씨라는 것을 그리고 쓸 수 있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2018. 9. 20. 향산 고윤숙 쓰다.

금은돌(시인)

1.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기형도, 「여행자」에서)

여기, 칼춤을 추는 여인이 있다. 한 발은 모래알 사이에서 허우적대면서, 다른 한 발로 탈출구를 찾고 있다. 마흔일곱 번의 고비를 넘기며, 마흔일곱 번의 피를 흘린다. 마른 바람 사이에서 숨을 고른다. 마흔일곱 개의 주저흔이, 마흔일곱 번의 망설임으로 미끄러진다. 그녀의 대지는 막막하고, 칼은 기다림의 시간 위에 놓인다. 일 년 내내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애타게, 그러나 담담한 척, 눈치 채지 못하게, 그러나 그럴듯하게, 그리하여 능숙하게, 마흔일곱 번의 붓을 휘둘렀다. 마흔일곱 번의 그림은 무너짐의 흔적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이 도착하는 순간, 그녀는 칼을 벼리며 몸을 만들고, 어떤 춤을 추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녀는 통화 중.

일주일에 한 번씩, 애 닳도록 공부하는 여자. 일주일에 한 번씩, 기꺼이 길을 잃는 여자. 수요일마다 무너지는 여자. 그 무너짐을 견디는 여자. 칼자루를 쥐는 순간, 하얀 피가 떨어진다. 칼의 방향을 결정하기 전부터, 저리다. 그 손끝으로 흩어진 사건의 파편을 긁어모은다. 배치하고 뒤튼다. 캔버스 위에서, 서성인다. 실패한 자의 표정으로, 다시 일어서는 자의 손짓으로.

마흔일곱 번 들이마셨던 숨으로
마흔여덟 번 털을 세운다.
다시, 그러하기에

2.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기형도, 「오래된 서적」에서)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는 사건의 복합체이다. 말을 탄 선비가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선듯선듯, 소슬바람, 반쯤 걸쳐 있는, 버들잎, 흩날리듯, 아스라이, 존재자의 존재가 담겨있다. 그곳에 소년의 가려진 몸이 있다. 몸의 일부가 말[馬]의 의해 감추어졌으나, 소년 역시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돌리다 못해 정지한다. 말고삐를 잡고, “워, 워.” 소년이 몸을 돌린 곳은 소리의 진원지이다. 말을 탄 선비가 고개를 돌린 곳 역시, 그곳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적으로, 감각적으로, 행위가 발생한다. 새가 먼저 있었던가? 행위가 앞서 있었던가? 중요하지 않다. 소리의 진원지에 새가 앉아 노래 부른다. 가느다란 바람에 연둣빛이 흔들린다. 공기가 상쾌해지고, 소리가 경쾌해진다. 선비의 삿갓에 빛이 스치고 먼지가 가라앉는다. 소리와 바람, 햇살과 향기, 귀여운 날갯짓과 연두, 잎의 떨림과 말의 정지. 한 잎 한 잎, 순간순간, 생명이 담긴다. 화폭에 소리가 그려진다.

한 획(劃)이어야 한다. 입체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인위적인 원근법을 이용한 덧칠을 하지 않는다. A에서 B로 다가가는 평면적인 선(線)이 아니다. 붓으로 3D 입체 영상을 풀려나가게 한다. 인과론적인 시간을 초월한, 낯선 대기가 작동한다. 시각과 청각, 후각과 미각이 동시에 살아 움직인다. 멀티미디어의 주파수가 다차원적으로 흘러나온다. 시인 기형도가 일찍이 노래하듯, 시는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그 한 줄, 그 한 획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

애드거 앨런 포는 소설 「말의 힘」(『우울과 몽상』)에서 ‘아가소스’와 ‘오이노스’의 대화를 통해 언어 작용에 대해 설명한다. 멸종된 지구를 앞에 두고 오이노스가 질문을 하고 아가소스가 답하는 형식이다. 아가소스는 ‘대기’의 작동을 통해 말(언어)의 힘을 말한다. “땅 위에 사는 인간이었을 때 우리는 손을 움직여서 손을 둘러싼 대기에 진동을 줄 수 있었다. 최초의 진동은 무한히 뻗어나가 결국 지구의 공기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결국 단 한 번의 손 움직임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다. (중략) 공기에 가해진 그러한 모든 자극은 결국,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기체에,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 이어서 “모든 운동은 창조하는 것”이라는 전제에 동의하면서, 오이노스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네 마음속에 어떤 실제적인 말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느냐?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공기에 자극을 가하지 않느냐?”라고.

공기에 자극을 주는 일. 우주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 그것이 한 획이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처럼 버드나무 잎과 새의 노래, 말발굽과 선비의 시선, 마부의 발걸음과 바람의 만물조응(萬物照應)이 한 획이다. 그 긴장된 설렘이 담겨있어야 한 획이라 명명할 수 있다.

한 획으로 짜릿하게, 그 획 안으로 절실하게, 마음을 담는다. 투명한 소원을 품은 주술을 걸고, 한 호흡으로 휘어져 들어간다. 털이 빨려 들어간다. 한 획은 그러므로, 휘말려 들어감이다. 한 획은 그러므로, 거침없음이다. 한 획은 그러므로 매혹이다. 한 획은 그러므로, 블랙홀이다.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공기 속의 유리병이다. 대기 속의 “푸른 유리병”(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이자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空中”(「포도밭 묘지 1」)이다.

한 획은 문(門)이 된다. 차원을 이동하는 타임머신이 된다. 한 사람의 아티스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떠한 고통을 통과하였는지, 그 고통을 넘어서는 삶의 과정을 보여주는 농축액이 된다. 붓을 통해, 캔버스를 통해 한 획으로서, 펼쳐놓아야 할 과제를 그녀는 안다. 내가 나를 넘어서는 과정이 한 획의 힘이라는 것을 예감한다. 알지만 모른다. 한 획의 꿈틀거림 속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되어 유희할 수 있도록.

3.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기형도, 「물 속의 사막」에서)

선어록에 그림을 덧붙이는 작업은 가변 세계로 뛰어드는 일이다. 불변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모델을 따르지 않는다. 상수를 거부하고 변수에 따라 흔들리는 일, 변수(變數)와 변인(變因)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언어적인 활동의 입자적이고 양자적인 수단으로까지 나아가는”(이진경, 『노마디즘』) 것을 포함하는 작업이다. 음향적 연속체 속에서 그녀의 칼춤이 살인검이 될지 활인검이 될지 알 수 없다. 무너뜨릴 형체가 분명하지 않다. 화용론의 무수한 변수 속에서 방황을 감수해야 한다. A가 A가 되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J가 되었다가, 상황에 따라 AA이었다가 –A였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선형적이지 않고 초선형적으로 무궁무진하게 변화하기에, 선어록을 읽는 일은 그 자체로 난감하다. 그 자체로, 고정 관념을 깬다. 그 자체로 자신이 딛고 있던 땅을 무너뜨리는 고행을 병행한다. 형체가 보이지 않기에 이러쿵저러쿵, 하다 망쳐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든다. 붓을

털을 다듬으며, 그녀가 인정한다. “언어 외적인 변수들이 체계적 단절보다는 오히려 주파수의 점진적 변용에 의해, 상이한 용법의 공존과 연속성에 의해 하나의 화행적인 복합체를 구성”(이진경, 『노마디즘』)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지의 음역을 개척하는 현대음악처럼, 경계와 경계를 지우는 작업을 시도한다. 유화와 먹의 경계를, 활자와 그림의 경계를, 음악과 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사이’를 벌려 중간 지대를 확장한다. 칼집에서 꺼낸 칼을 집어넣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칼은 이미 취모검(吹毛劒)이다. 입김만 불어도 가벼운 털이 두 동강 난다. 아슬아슬하고 날카로운 춤이 탄생한다. 누구의 입김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털의 운동이 시작된다.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답변이 변화한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기의 맛이 변한다. 털의 운동에 예민한 그녀가 매일매일, 캔버스 위로 자신을 내던진다. 몸을 비운다.

백지가 되기 위함이다. 역설과 반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토를 버린다. 흩어 놓는다.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황야로 내몬다. 미지의 장소이다. 그곳에서 바보/백치가 된다. 이것은 욕이 아니다. 바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최대한 끝까지 밀고 가는 자다. 백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서 벗어난 것을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자다.” (이진경,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그녀는 우직하게 끝까지 노력하는 바보이고, 규정성을 넘어서는 무위를 향해, 뚜벅뚜벅, 고통을 받아들이는 백치이다. 우아하게, 텅 빈, 무규정적 존재이다.

일 년 47주 동안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몰랐고,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릴 수 있었다. 몸을 비우고 기법을 버리고, 연기적 순간에 따라 오는 감각을 받아들였기에, 그리지 못할 뻔했던 것을 역설적으로 그려 내었다.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무엇을, 어떻게, 해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또 부딪혔다.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십니까?”라고 달마에게 묻듯, 그녀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모르겠습니다.”라고. 모르기에, 버텨왔다. 서양화에서 서예의 세계로, 서예의 세계에서 동양화의 세계로. 득의망상(得意忘象, 뜻을 얻었으면 상을 버려라)의 세계로.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면서, 한 획을 꿈꾸며, 끊임없이, 연마했다.

4.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기형도, 「포도밭 묘지 1」에서)

그리하여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림이다. 그런데 이것은 털의 운동이다. 하물며 붓의 고요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행의 흔적이다. 그러나 수행만이 아니다. 저것은 기다림의 결과이다. 더불어 과정이다. 혼(魂)이 길 위에 있다.

흔들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전제’를 뒤흔드는 화용론 위에 있기에, 지각 변동과 지진을 각오해야 한다. 균열하는 지축 위에서, 그때 그 순간, 대기의 뜨거움과 함께 흔들린, 작품임을 알아야 한다. 무너지면서 일어서는 그림임을 직감해야 한다. 그러한 운동성이 담긴 작품임을 바탕에 두어야 한다. 2017년 연희동의 대기에서, 수유너머 104의 대기에서, 화가 작업실의 공기에서, 인사동의 촬영장에서, 신문지면 위에서, on-line 상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내가 나를 넘어서기를 바라는 공기 방울들이 흘러넘친다.

한때, 하나의 흐름 속에서 유동하며, 맞장구치고 공감했던, 그 숱한 땀방울이 담긴 협동의 기록물이다. 2017년 1월, 촛불 광장에서 시작하여, 3월 10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대통령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고, 5월 9일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던 때의 공기가 섞여 있다. 11월 16일 포항에 지진이 발생하여 2018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짜가 연기되었던 대기가 담겨 있다. 12월14일 징역 25년이 구형된 최순실이 법정에서 비명을 지르던 소란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가?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렸습니다.”라고 아득하게 넘겨 버렸을까? 그러나 이 순간에도 고윤숙은 초월하며, 무너지고 있었다. 몰락하며,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초험적으로 넘어서, ‘나’라고 명명되는 규정들을 지우며, 모르는 곳을 향해 온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기꺼이 자신을 깨드리는 곳으로, 밑바닥이 붕괴되는 지점을 향해, 심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소에서, 반복하여 일어서고 있었다. 동굴의 시간을 통과하며, 그녀 스스로 “넘어서는 자”(『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붓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부처를 죽여본 적이 있는가?

5. 내버려두세요. 뭐든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까? (기형도, 「소리 1」에서)

어느 스님이 파릉(巴陵)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취모검입니까?”
“산호의 가지마다 달이 걸려 있구나.”

아름다운 비약이다. 날카로운 칼날에 털이 잘려나가듯, 나뭇가지에 달이 조각난다. 숱한 조각, 조각, 조각들, 빛의 파편들이 흩어진다. 달빛을 자른 가느다란 것들이 취모검이었다. 사방 세계의 질료가 검이자 도구였다. 살아있는 획을 만들 수 있는 도구는 모든 곳에 있다. “한 티끌이 일어나니 온 대지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 송이 피어나니 그 속에 세계가 열린다.”(‘벽암록’ 19칙 垂示)

그녀는 마흔여덟 번째 일어서기 위해, 새로운 대기를 빚는다. 스스로 무너뜨릴 줄 알기에, 무섭게 태어날 줄 안다. 본인은 본인이 무서운 줄 모른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기에, 두려울 게 없다. 그 힘으로, 시작할 수 있기에 아름답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냥‘ 내버려 두는 일이다. “그냥”이 그냥, 어렵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개입하지 않고, 담담하게 지켜보는 일.

그녀는 이미 스스로의 주인이다.(隨處作主) 자신이 선 자리에서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안다.(立處皆眞)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오고가는 것을 담담하게 비출 줄 안다.(物來卽照)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넘어선다. 당연히

또 다른 검을 들 것이다. 그녀의 춤 덕분에, 나의 털이 쭈뼛, 선다. 그다음엔 어떤 춤을 출까? 활인검이 되어 날아오를까? 특이한 털의 감각으로, 우리를 어디에 데려다 줄 것인가? 그녀가 검을 휘두르지 않고도 혀를 떨어뜨리고, 눈 뜬 자의 멍한 눈을 멀게 했으면 좋겠다. 살아서 헛것이 아니도록 깊어지는 칼, 풍요로운 칼을 든 그녀를 상상한다. 지혜의 칼을 든 그녀가 시간의 오색 판을 돌려,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비약하길 기대해 본다. 그녀의 칼이 만물을 삼킨 뒤 광채를 토하도록, 사물을 사뿐하게 베어버리도록, 별 다르도록.

‘심연’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백척간두’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나를 묻다’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청정법신’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본래무일물’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새로운 대지’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무생법인’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무정불성(無情佛性)’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무정설법(無情說法)’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불성즉공(佛性卽空)’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평상심(平常心)’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불이법문(不二法門)’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백지경전(白紙經典)’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무명적삼 일곱근’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설불가설(說不可說)’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아자천연(我子天然)’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웃음을 모르는 자들을 조심하라’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수타거(隨他去, 겁화에 파괴되어 버린다)’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덕산탁발’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뜰 앞의 잣나무’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평지풍파(平地風波)’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직입천봉만봉거(直入千峰萬峰去)’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일화개 세계기(一花開 世界起)’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강섭월출(牨涉月出, 물소는 거닐고 달은 뜨다)’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물래즉조(物來卽照, 오고가는 대로 비추어 보라)’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밭 가는 물소가 되라’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북을 칠 줄 안다’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발 아래가 한바탕 망신이지(脚底下一場懡儸)’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무위(無爲)’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모르겠습니다’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야승추로적부거(也勝秋露滴芙蕖)’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묘봉정(妙峰頂), 계도 없고 부처도 없고’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본래면목(本來面目)’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산에 핀 꽃은 비단결 같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구나 (山花開似錦 澗水湛如藍)’ 72.7×60.6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제행무상(諸行無常)’ 72.7×60.6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우(愚)’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비유비무(非有非無)’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염신불구무병(念身不求無病)’ 72.7×60.6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병이란 내 몸에 날아든 날개의 씨앗’ 72.7×60.6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72.7×60.6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일세계즉대천세계(一世界卽大千世界)’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발우를 들고 성에 들어가 밥을 드시오’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부처, 본래면목의 자리’ 72.7×5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Artist

고 윤 숙 / KOH, YOON-SUK
향산(香山), 산목재(散木齋)

선화예술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유학과 재학

2018
제9회 강섭월출(牨涉月出)_물소는 거닐고 달은 뜨다 (불일미술관 1, 2관, 서울)
제8회 MOON SICK_득의망상 得意忘象 (B. CUT 갤러리, 서울)

2017
제7회 화석의 여름_김시종 시에 부쳐 (2017 스페이스선+ 추천작가전, 서울)

2016
제6회 마음자리_말도끊기고생각도끊긴 (한옥갤러리, 서울)

2015
제5회 변이의 여백_존재의 기억의 말을 걸다 (갤러리 M, 서울)

2014
제4회 하나의 꽃 (한옥갤러리, 서울)
제3회 花開華謝_꽃은 피고 지고 (가나아트스페이스, 서울)

2006
제2회 北冥有漁_북명유어 (토포하우스, 서울)

2004
제1회 거듭나기 (경인미술관, 서울)

2018
제45회 이서전, 가나인사아트, 서울
제23회 서울서예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인사동한국미술관, 서울
의난현예술학회회원전-대만한국미술교류전, 의난현, 대만
제3회 열림 서예연구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아트센터, 서울
제30회 대한민국서예대전 한문부문(예서) 입선, 인사동한국미술관, 서울
제9회 샤샤전, 금보성갤러리, 서울
제21회 신사임당, 이율곡 서예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초서) 입선, 인사동한국미술관, 서울

2017
제22회 서울서예대전 한문서예(예서) 특선, 인사동 한국미술관, 서울
제9회 샤샤전 갤러리이앙, 서울 첼시 아트페어, 영국
제29회 대한민국서예대전 한문서예(해서) 입선, 대구문화예술회관 전관, 대구
제20회 신사임당, 이율곡 서예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예술의 전당, 서울

2016
의난현예술학회대만한국미술교류전(宜蘭縣藝術學會臺韓美術交流展), 의난현, 대만
제44회 이서전(이화여대 서양화과 동문전) 인사아트스페이스, 서울
제8회 샤샤전 갤러리이앙, 서울 제28회 대한민국 서예대전 전각부문 입선
제2회 열림 조고관금(照古觀今)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아트센터, 서울

2015
제7회 샤샤전 동국아트갤러리, 서울

2014
의난현예술학회대만한국미술교류전(宜蘭縣藝術學會臺韓美術交流展), 의난현, 대만
제6회 샤샤전 갤러리이앙, 서울
제43회 이서전(이화여대 서양화과 동문전) 인사아트스페이스, 서울
제1회 열림 필가묵무(筆歌墨舞)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아트센터, 서울

2013
제5회 샤샤전 선화예술고등학교 솔거관, 서울

2011
세계평화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금문) 특선, 전각 입선, 안산단원전시관, 안산

2010
제14회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한문서예(금문) 입선, 한국미술관, 서울
제13회 신사임당, 이율곡 서예대전 전각 부문 입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제7회 서예문화대전 한문서예(금문) 특선,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2009
제7회 한국서화명인대전 출품, 전각 부문 입선, 세종문화회관 별관 광화문갤러리, 서울
제13회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전서)대련 동상. 한국미술관, 서울
제6회 서예문화대전 서예 한문부문(전서) 입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제4회 경향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전서) 입선, 경향갤러리, 서울

2008
제12회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대련 특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제11회 신사임당, 이율곡 서예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한국미술의 빛” 초대전 서양화 부문 출품, 밀라노 브레라아트센터, 갤러리타블로, 이탈리아, 서울
제3회 경향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경향갤러리, 서울

2007
제10회 안견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서산시문화회관, 충청남도 서산시
아트엑스포말레이시아, 서양화 부문 출품, 갤러리미즈, MECC, 말레이시아

1998
선화예술고등학교 동문전, 서울

1997
선화예술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개교20주년 동문전, 공평아트센터, 서울.

법보신문 2017년 <철학자 이진경 선어록을 읽다> 그림 연재
​수유너머 위클리 <돌에 새기는 이야기> 연재

2003~2009
[연구공간 수유+너머] – 토요서당 동양고전 및 시문학강의/ 서예 및 전각/ 서양화 강의

2009~2011
[수유너머 길] – [인문학아카데미 길벗] 서양고전 읽기 및 고전 강의 [카톨릭 청소년쉼터] 비극 및 시, 서양화 강의. [꿈틀공부방] 동서양고전 강의

2016
[수유너머N] – <획(劃)이 그리는 세계 – 서예의 철학과 역사> 강의

2018
장애성인 채움누리학교 미술강의

2016~ 현
[수유너머104] – 서예 동아리 강의

열림서예연구회 회원
수유너머104 회원
한국문화답사회 회원

동묵헌에서 자암 김장현 선생님께 서예와 전각을 사사 받고 있음.

작품문의 (Contact For Price)

2018-10-07T22:33:30+00:00